‘위플래쉬’, 왜 플렛처의 미친 교육법에 환호하는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재즈 드러머의 혹독한 성장기를 담은 영화 <위플래쉬>가 예상 밖의 흥행을 보여주고 있다. 젊은 층을 위주로 입소문을 타고 100만 관객 돌파 했으며, 현재 예매율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음향상, 편집상을 수상하는 등 뛰어난 만듦새를 지녔다는 점에선 이견이 없는 수작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아카데미 등 해외영화제 수상작들이 번번이 국내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으며, 음악영화에 대한 저변도 취약하고, 특히 재즈에 대해선 생소하게 느끼기 쉬운 국내 관객들이 유독 이 영화에 대해서만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 음악영화라기 보다는 교육영화

영화 <위플래쉬>는 뉴욕의 셰이퍼 음악대학에서 재즈드럼을 공부하는 앤드류가 홀로 연습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장면은 플렛처 교수가 몰래 보는 시점 숏이었다. 이윽고 플렛처 교수가 앤드류에게 말을 건다. 위압적인 교수는 앤드류를 쩔쩔매게 만들며, 자신의 오케스트라에 초대한다. 앤드류는 최고의 실력자 플렛처 교수의 눈에 들었다는 점에 설렌다. 그런데 오케스트라의 분위기가 참 살벌하다. 틀린 음을 낸 연주자를 잡아내겠다며 윽박지르던 교수는 결국 한 연주자를 쫓아낸다. 그는 틀리지 않았지만, “네가 틀렸지?”라는 교수의 말을 부인하지 못할 만큼 확신이 없다는 죄로 쫓겨났다.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최고의 실력을 요구하는 플렛처 교수는 종잡을 수 없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실력이 약하거나 담력이 약한 학생은 내쫓긴다. 연주자의 뺨을 때리고, 인종차별적 폭언과 혐오발언을 퍼붓는가 하면, 학생의 가족사를 들먹이며 정신적인 학대를 가한다. 대체 그는 왜 그러는 걸까.

플렛처는 앤드류에게 전설적인 드러머 ‘버드 리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수한 찰리 파커에게 조 존스가 심벌즈를 집어던진 것을 계기로 찰리 파커가 ‘버드 리치’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즉 그의 폭력적인 조련은 학생들의 잠재력을 끌어내어 제2의 ‘버드 리치’를 만들기 위한 교육법이란다. 앤드류는 아버지의 직업을 묻는 질문에 “작가가 아니라 선생에 가깝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플렛처에 의해 변주된다. 그는 “나는 지휘자가 아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천재적인 제자를 발굴하여, 그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플렛처는 스스로를 교육자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 영화 또한 그저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는 음악영화가 아니라, 플렛처의 극단적인 교육법을 보여주며 반문하는 교육영화이다.



◆ ‘천재를 만드는’ 플렛처의 교육법?

그의 교육론은 학대와 경쟁으로 학생을 극한으로 내몰면 걔 중 한 두 명은 자기한계를 뛰어넘어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고 해로운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라고 말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만, 천재는 못 만든다. 그렇다면 천재가 아닌 사람은 그 과정에서 어떻게 될까. 떨어져 나오거나, 폐인이 되거나, 죽는다.

실제로 제자 중에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자살한 연주자가 있었다. 플렛처는 잠시 그를 기리며, 눈물을 흘린다. 최초의 인간적인 모습에 학생들이나 관객들은 놀란다. 그의 폭언 뒤에 이런 사랑이 숨어 있었구나 하며, 그의 교육론에 수긍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플렛처는 제자의 사인을 교통사고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에게 제자의 죽음은 단순사고일 뿐이며, 자신의 가학적인 교육에 대한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악어의 눈물인 셈이다.

앤드류는 플렛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손에 피가 나도록 연습한다. 경쟁으로 매일 바뀌는 드럼주자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는 여자 친구와도 헤어진다. 그가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은 흡사 고시생이 공부해야 되니까 헤어지자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친척들과의 식사자리에서 그는 열등감과 자만심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등 인성이 피폐된 모습을 보여준다. 교통사고로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벌떡 일어나 연주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흡사 미치광이거나 좀비처럼 보인다. 마치 도박이나 주식으로 큰돈을 잃은 사람들처럼, 그는 경쟁에 중독된 맹목적인 욕동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러한 상황이 정상이 아니며, 플렛처의 교육법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잘못되었음을 환기시킨다. 대학 직원은 제자의 자살사건을 알려주며, 앤드류에게 플렛처의 학대를 고발하도록 한다. 이 장면은 그동안 플렛처와 앤드류에 의해 주도되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해주며, 플렛처의 교육이 교수직을 잃을 만큼 반사회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균형감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의 균형추는 다시 플렛처의 가학적인 예술교육론으로 옮겨간다.



◆ 실력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영화 <위플래쉬>의 클라이막스이자 결말에 해당되는 마지막 10분은 온전히 연주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는 최고의 실력을 요구받는 예술학도의 분열과 광기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블랙스완>과 비견될 수 있다. <블랙스완>의 결말은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적 열망은 결국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성찰적인 결론을 보여준다. 그러나 <위플래쉬>의 결말은 <블랙스완>의 결말과 상반되는 의미를 도출한다.

학교에서 쫓겨난 앤드류와 플랫쳐가 다시 만난다. 플렛처는 달콤한 말로 앤드류의 욕망을 자극한다. 애초부터 다른 드럼주자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너만이 천재 발굴 레이더에 맞는 인물이었다고. 내가 혹독하게 대한 건 너를 천재로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앤드류는 다시 플렛처의 무대에 선다. 그러나 그것은 플렛처의 덫이었다. 자신을 교수직에서 쫓겨나게 한 앤드류에게 복수하기 위해 앤드류에게 곡을 잘못 알려 준 것이다.

혹자는 플렛처를 보고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플렛처가 ‘음악을 사랑하는 지휘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둘은 매우 다르다. 플렛처가 ‘음악을 사랑하는 지휘자’였다면 사적인 복수를 위해 무대를 망치는 짓은 도저히 못했을 것이다. 앤드류에게 엉터리 연주를 하게끔 한 그의 복수는 앤드류 뿐 아니라 다른 협주자들을 괴롭히는 행위였고, 관객을 무시한 행위였으며, 음악을 모독한 행위이다. 확실히 그는 지휘자가 아닌 교육자라고 볼 수 있는데, 단 한명의 천재를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학생들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가장 반교육적인 철학을 지닌 교육자이다.



플렛처의 미친 교육이 던지는 살벌한 분위기와 가학-피학의 정서는 국내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공감을 일으킨다. 일단 그 교육관과 정서가 매우 익숙하게 느껴진다. 앤드류가 친척들과의 대화를 망치고, 여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대화상대는 아빠밖에 없으며, 동료연주자들과의 관계가 오로지 경쟁뿐이라는 사실에 경악하는 관객은 별로 없다. 관객들은 노력을 통해 경쟁에서 이기고 최고가 되려는 앤드류의 열망에 감정을 이입한다. 그가 실력을 연마하고 플렛처의 가학적인 교육을 넘어서기를 응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은 플렛처의 시험에 걸려든 앤드류가 곡목을 바꾸어 미친 듯한 연주로 플렛처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력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동료들 간의 소통이나 배려는 전혀 중시하지 않는 플렛처의 교육철학에 따르면 앤드류의 행동은 잘못된 게 아니다. 영화 초반에 왜 연주를 멈추었냐던 플렛처의 비아냥이나 자기 확신이 없어서 쫓겨난 학생을 상기한다면, 여기서 앤드류가 자기 확신을 가지고 연주를 밀고 나가는 것이 옳다. 그것만이 플렛처의 교육론에 합당한 행위이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플렛처 판관을 때려눕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연습곡 ‘위플래쉬(채찍질)’를 연주하며, 무대를 리드한다. 영화는 플렛처의 표정을 아주 조금 보여주지만, 앤드류가 자기 한계를 돌파하고 연주하는 모습에 플렛처는 내심 만족했을 것이다. 살짝 보이는 플렛처의 미소는 ‘내 교육론이 틀리지 않았어’라는 말을 들려주는 듯하다. 치졸한 사적 복수는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 앤드류로 인해 고매한 교육자의 뜻으로 격상된다. 영화 역시 두 사람의 팽팽한 대결을 환상적인 연주장면으로 마무리 지으며, 이러한 천재 조련술을 긍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 저 정도 노력할 것 아니면, 말을 말자?

이러한 결말은 국내관객들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미친 교육에 도태되지 않고 실력을 쌓아서 나를 학대하던 선생을 치고 나가 그의 인정을 받는 것.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교육환경에서 실력으로 이겨 복수한다는 판타지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음악이 마치 스포츠처럼 단지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되고, 오직 한명의 천재를 발굴하기 위해 나머지 학생들이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는, 반예술적이고 반교육적이며 반윤리적인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은 부각되지 않는다.

오직 땀과 피를 쏟으며 연주하는 앤드류의 열정과 그에게 흡족한 미소를 짓는 플렛처의 교감이 스크린을 꽉 메우면서, 관객들은 피학적인 동일시와 판타지적인 쾌감에 빠져든다. 몇몇은 ‘플렛처와 궤를 같이하는 우리나라 경쟁교육은 그리 잘못된 게 아니야’ 하며 위무하고, 몇몇은 ‘내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앤드류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고 체념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미쳐야 미친다. 저기는 한국도 아닌 미국인데, 저들이 하는 것은 하물며 예술인데, 저만큼 피 터지게 경쟁하는구나. 그러니 저 정도 노력할 게 아니면, 징징대지 말자, 아예 성공을 꿈꾸지 말자. 이런 메시지를 받은 관객은 차라리 속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학대와 실패가 모두 받아들일만한 고통으로 인지되는 것이다.

<위플래쉬>의 국내 흥행은 미친 교육과 청년실업의 시대를 역상으로 비추는 거울이다. TV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심사위원들의 괴팍한 심사평에 자기 목소리를 맞추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물을 쏟는 과정을 보여준다. 범람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가학과 피학, 열정과 체념의 강도가 점점 세 질수록, 더 큰 자극을 원하는 국내관객들에게 <위플래쉬>는 익스트림 버전의 ‘채찍 맛’을 보여준 게 아니었을까.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위플래쉬>스틸컷]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