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꽃’ 김성령에게 주어진 익숙하지 않은 숙제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미스코리아 출신 김성령이 연기 잘하는 중견배우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2012년 SBS 드라마 <추적자>에서 대통령후보 강동윤(김상중)의 아내이자 재벌2세인 서지수 역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녀는 이 드라마에서 무게감 있으면서도 절제된 연기로 대중들에게 존재감을 알렸다. 물론 거기에는 드라마 속 서지수를 의미 있는 여인으로 만들어준 박경수 작가의 짧지만 임팩트 있는 대사들도 한몫했다.

이후 그녀는 행운의 드라마들을 연속으로 만난다. SBS <야왕>은 드라마 자체의 작품성을 떠나서 그녀가 연기한 도도한 재벌2세 백도경의 매력만은 높이 살만했다. SBS <상속자들>에서 보여준 주인공 김탄(이민호)의 푼수 같지만 럭셔리한 엄마 한기애는 이 드라마의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 중 하나였다. 이처럼 세 편의 드라마에서 그녀는 화룡정점까지는 아니지만 용의 발톱처럼 의미 있는 조연 역할을 톡톡히 한다. 생각해 보라, 발톱 없는 용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만만해 보일지. 그녀는 비록 드라마의 흐름에 큰 역할을 하는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그 드라마에 힘을 불어넣는 빛나는 존재였다.

MBC 주말드라마 <여왕의 꽃>은 빛나는 조연이었던 김성령이 주연으로 나선 드라마다. 시간대 역시 <욕망의 불꽃>, <백년의 유산>, <전설의 마녀> 등으로 MBC가 꽤 괜찮은 시청률을 올리는 자리다. 하지만 <여왕의 꽃>이 배우 김성령에게 도움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누구나 한 번은 인생에서 빛나는 순간이 있다.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순간, 나에게는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꿈꾸던 모든 것을 손에 움켜쥔 이 순간 평생을 기다려온 바로 그 날이다. 그러나 행복은 너무 짧았다.” (레나 정)

<여왕의 꽃>은 밑바닥 인생을 살던 요리사 레나 정의 성공과 좌절을 다룬 드라마다. 당연히 레나 정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 물불 가리지 않는 상황들이 이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라는 건 틀림없다.



많은 드라마에서 흔히 등장하는 설정이라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설정을 풀어내는 데 있어 <여왕의 꽃>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낡은 클리세를 반복한다. 2014년의 드라마가 아니라 1980년대 추억의 드라마를 보는 착각까지 들 정도다. 상황도 그러하고 대사들도 그러하다. 임성한 작가가 <오로라 공주>에서 쓴 “암세포도 생명이에요.”는 너무 황당해서 실소가 터진다면 레나 정이 내뱉는 “역시 정보가 생명이야.”는 너무 낡은 비유라 민망해진다. 그 뿐이 아니라 80년대 하이틴 잡지에 나왔을 법한 “꽃은 절대로 지지 않아.”나 “데이트에 늦는 건 여자의 특권이야.” 같은 대사들도 만만찮다.

심지어 <여왕의 꽃>에 간간이 등장하는 유머코드마저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마음이 개미똥구멍이라거나 가만히 있으니 가마떼기로 보이냐는 대사들이 그러하다. 아내 몰래 아내의 블랙커피에 침을 뱉으려다 들킨 남편은 당신 걱정돼서 로열젤리 좀 타려고 했다는 말로 둘러친다. 침이 로열젤리라니, 이게 어느 시절 농담인가? 진지한 부분은 낡아서 우스꽝스럽고 웃기려는 부분은 낡아서 웃기지가 않다.

<여왕의 꽃>의 이런 단점들을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돌파한다. 송옥숙이나 김미숙처럼 80년대에 수많은 드라마를 연기했던 배우들은 이 낡은 대사들을 적절하게 포장해서 연기할 줄 안다. 송옥숙은 식상한 감정이 밴 대사들에 진짜 감정을 불어넣어 눈물샘을 자극한다. 김미숙은 아무리 낡은 대사라도 드라마에 어울리는 적절한 톤으로 연기할 줄 아는 베테랑이다.



탐욕스러우면서도 음흉한 산부인과 의사 최혜진을 연기하는 장영남은 이 드라마에서 단연 돋보인다. 장영남은 대학로 출신의 연극배우답게 이 독살스러운 여인의 낡은 대사를 오히려 극적인 감정을 실어 강하게 푼다. 그런데 낡은 대사나 낡은 인물을 연극적으로 연기하는 장영남 덕에 오히려 이 캐릭터는 <여왕의 꽃>에서 가장 인상적이다. 반대로 <여왕의 꽃>에서 가난하지만 당당한 강이솔을 연기하는 이성경은 오히려 풋풋하게 연기해서 의도치 않게 드라마의 단점이 가려지는 경우다.

안타깝게도 여주인공 레나 정을 연기하는 김성령의 경우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녀의 연기는 현재까지는 답답하다. 이 드라마가 가진 단점들을 여주인공이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레나 정은 개연성도 없고 진실도 없어 보이는 캐릭터다. 오직 드라마의 재미만을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밑바닥 삶을 전전하다 성공하는 여성이란 사연은 설정일 뿐 이 인물의 살아 있는 모습은 아니다.

이처럼 캐릭터에 설정만 있고 영혼이 없을 경우 영혼을 불어넣는 역할은 오롯이 배우의 몫이다. 하지만 김성령은 지금까지 잘 만들어진 개성적인 인물이 지닌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이 어울리는 배우였다. 그러니 <여왕의 꽃>의 레나 정은 배우 김성령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숙제인 셈이다. 안타깝게도 김성령의 레나 정은 욕심 많은 여인으로도, 요리에 능한 요리사로도, 내면에 슬픔이 있는 인간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 설정만이 보일 따름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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