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상회’ 황혼로맨스의 서글픈 이면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장수상회>는 박근형·윤여정의 황혼 로맨스를 그린 영화이자, 반전을 통해 감동을 전하는 가족 드라마이다.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누나> 시리즈의 번외판이 아닐까 싶은 캐스팅에, 처음엔 가볍게 웃기다가 나중엔 눈물 나는 흐름도 매우 대중적이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을 음미해보면 대단히 씁쓸하다.

◆ 괴팍한 독거노인의 연애?

1960년대 시골의 수줍은 소년, 소녀를 비추는 인트로로 시작된 영화는 현재의 주택가로 옮겨온다. 앞집에 이사 온 금님(윤여정) 모녀에게 핀잔을 주는 괴팍한 독거노인 성칠(박근형)은 해병전우회 소속 후배에게 인사를 받으며 장수마트로 출근한다. 재개발로 술렁이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개발에 반대하는 성칠을 구슬리기 위해 마트사장 장수(조진웅)는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꽃할매 금님이 성칠에게 살갑게 말을 걸고, 두 사람은 데이트를 시작한다. 장수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은 두 노인의 데이트를 적극 응원하며, 성칠이 재개발에 동의하기만 기다린다. 금님의 정체에 모종의 비밀이 있으며, 성칠의 건망증이 심상치 않다는 낌새를 차릴 즈음, 영화는 굉장한 반전을 드러낸다.

영화가 보여주는 금님과 성칠의 데이트는 상당히 정겹다. 특히 금님은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사랑스러울 수 있음을 보여주며, 어떻게 하면 무뚝뚝한 남자에게 말을 걸어 연애를 시작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금님은 끊임없이 자신의 말 속에 상대를 연루시키는 방식으로 남자의 환심을 이끌어내는데, 이런 화법은 연애에 서툰 사람들이 배울 만한 태도이다. 성칠 역시 데이트를 위해 옷차림이나 매너 등에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러한 두 사람의 모습에서 연애란 나이에 관계없이 매우 보편적인 역할극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또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가 하는 것을 공감하게 된다.



◆ 노인의 삶은 사회가 아닌 가족의 몫?

하지만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연애는 영화의 반전에 의해 보편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괴팍한 독거노인에게 살가운 할머니의 접근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이나 사연에 의한 것으로, 영화는 결국 황혼연애가 아니라 가족의 이야기가 된다. 일생 혼자 살던 독거노인에게 황혼 로맨스는 판타지요, 그런 행운도 젊어서부터 인연을 만들고 가족을 구성한 사람의 몫이라는 결론이다. 그러고 보면 독거노인 성칠의 현재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요소들 역시 사실은 가족으로부터 유래한 것들이다. 성칠을 고용한 마트사장, 그와 대화해주는 젊은이들, 그를 무시하지 않는 동네사람들 등등. 그가 현실의 여느 노인들보다 지역사회에서 대접받고 살고 있는 이유도 처음에는 그의 부동산 때문인가 하였지만, 결국은 가족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동산을 소유하지도 가족을 구성하지도 못한 독거노인의 현실은 무엇일까. 영화가 스치듯 보여준 해병전우회 소속 후배(임하룡)의 삶이다. 그는 자신이 해병대였다는 자부심과 정체성만을 지닌 채, 온전치 못한 정신 상태로 완전히 고립된 채 살다가 고독사 하였다. 공동체를 지켰다는 자부심과 공동체에서 내쳐진 삶을 살고 있는 현실 사이의 괴리는 얼마나 먼가. 철지난 군가를 부르며 때 묻은 손으로 크림빵을 욱여넣던 그는 그 틈 사이로 추락했다. 영화는 그의 죽음을 전하는 구청직원을 단 한 차례 등장시킬 뿐이며, 성칠을 제외하고 그의 죽음에 애도와 책임을 느끼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노인의 삶과 죽음은 온전히 가족의 몫이며, 지역사회나 정부 등 공동체의 몫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처럼 문제의식은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한계에서 한 치도 나아간 바가 없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노년의 사랑을 그린 영화로 호평 받았지만, 노인들의 욕망과 어려움을 생생히 그리기보다는 젊은이들의 입장에서 낭만적으로 봉합해버린 면이 있다. 치매와 병고는 노인들끼리 알아서 보살피며 해결하고, 그것이 감당 안 될 때는 두 사람이 알아서 조용히 죽고, 노년에 진정한 사랑을 만나더라도 재혼한다며 자식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며, 경제적인 문제는 끝까지 노동하여 생계를 꾸려나가고, 정부나 사회에 당당하게 복지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작은 복지에도 감지덕지하는 노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복지를 떠맡고 싶어 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원하는‘착한 노인상’이 아닐 수 없다.

<장수상회>가 품고 있는 노인문제에 대한 인식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모처럼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환대받고 살아가는 독거노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애틋한 황혼 로맨스까지 펼쳐 놓지만, 이 모든 것은 일장춘몽이었다. 더욱이 이 모든 일들이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 노인의 강박에 의한 것이었다니, 노인은 곧 가족의 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공고화하는 셈이다. 결국 노인의 사랑, 일자리, 인간관계 등 그의 삶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가족 안으로 수렴되며, 몸과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노인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품는 복지의 문제의식은 백안시 된다.



◆ 가족안의 노인, 부동산 소유주로서의 노인

지역개발에 반대하던 완고한 노인이 결국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고집을 꺾는다는 서사도 문제적이다. <나의 독재자><국제시장> 등이 모두 완고한 아버지와 자식이 기필코 만나는 접점을 부동산 개발로 삼고 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노인은 주로 부동산 소유주로 소환된다. 나에게 임대료를 받아가는 건물주이거나, 나에게 집을 물려줄 부모이거나. 많은 영화들이 노인을 재개발 동의서에 찍어야 할 인감도장의 주인으로 소환하는 동안, 한 평의 부동산도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노인의 가치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영화가 화사한 황혼로맨스를 한껏 그리며 풀어놓는 이야기가 결국 ‘가족안의 노인’이자 ‘부동산 소유주로서의 노인’이란 사실은 서글프다. 이는 물론 노인의 일자리와 복지, 연애 등을 사회적으로 사고할 여력도 의지도 없는 이 사회의 한계와 무의식을 반영한 결과이다. 그래서 더욱 서글프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장수상회>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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