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상회’, 베테랑 박근형에 갇힌 아버지 캐릭터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강제규 감독의 신작 영화 <장수상회>는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다 열거하다가는 본론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원고를 마쳐야 할 정도다.

가장 먼저 신경 쓰이는 것은 영화 <러블리, 스틸>의 리메이크이면서 홍보에 원작을 언급하지 않는 태도이다. 이 영화만 그런 건 아니다. <내 아내의 모든 것>, <감시자들>과 같은 영화들은 모두 원작이 있었고 홍보에 원작을 밝히는 데에 소극적이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 <레이크하우스>의 원작이 <시월애>라는 걸 아는 미국 관객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원칙이라는 게 있다. 특히 '한국 노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미국 영화 원작 리메이크 영화라면 원작은 당연히 언급되어야 한다. 그래야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해진다.

<장수상회>가 아이돌을 홍보하는 방식도 마음에 안 든다. 아이돌이 배우로 나오는 그들을 홍보에 활용하는 것 자체를 보고 뭐랄 수는 없다. 하지만 <장수상회>는 그 선을 넘는다. <카트>처럼 아이돌에게 의미있는 비중의 역할을 주고 그에 맞는 홍보 역할을 준다면 누가 뭐랄까. 하지만 <장수상회>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며 몇 분 간신히 나오다마는 역할에 아이돌을 배정한 뒤 그 이름으로 홍보를 도배한다. 이게 사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사기인가.

심지어 간접광고도 문제가 있다. 가장 심각한 건 CGV 간접 광고이다. 영화 관람은 이 나라에서 데이트의 필수 코스니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 노인네들이 편광안경을 쓰고 보는 3D x 4DX 영화의 유원지스러운 묘사는 오싹할 정도다. 그리고 그 소스로 쓰고 있는 영화가 (아마도 한국의 마지막 필름 영화일 수도 있는)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인 걸 보면 그냥 동료 영화인이나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기본 예의도 없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노인 묘사이다.

원작이 된 <러블리, 스틸>을 보자. 그렇게 좋은 영화도 아니고 깊이 있는 영화도 아니다. 딱 크리스마스 시즌에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특집극 수준이다. 주인공인 로버트 말론도 그 수준에 맞추어져 있다. 우리가 로버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가 늙었고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단지 로버트를 연기한 마틴 랜도는 이 제한된 조건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그의 모든 연기,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모든 대사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 완벽하게 노출된 단순한 인물을 최대한 사랑하게 하고 공감하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원작의 과도한 감상성에도 불구하고 이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장수상회>는 보다 복잡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원작은 주인공의 세대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로버트는 노인들이 있는 어떤 세계와도 맞는다. 하지만 <장수상회>의 주인공 성칠은 구체적인 세대, 그러니까 6,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지금의 한국 노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올바른 리메이크 방향이다. 원작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면 굳이 다시 만들 필요는 없다. 리메이크는 원작이 도달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방향을 추구했을 때 진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장수상회>의 주인공 성칠은 제한된 재료 안에서 최대한 활용되었던 로버트와는 달리 새로 추가된 복잡성 안에서 계속 길을 잃는다. 영화를 보면서 성칠을 온전한 한 명의 사람으로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에 여러분 눈에 성칠이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다면 그건 여러분이 한국 노인들을 묘사할 때 툭하면 써먹는 관습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라. 성칠은 하나의 관습이 아니다. 기계적으로 쓰이는 여러 관습의 다발들과 <러블리, 스틸> 캐릭터의 재료들이 어색하고 모순된 모양으로 얽히고 쌓여 있다. 이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통합되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가 성칠을 '아버지'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한 명의 구체적인 아버지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요새 한국 영화는 '아버지'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그 대상을 특정 세대의 추상적인 대표자로 제한해버린다. 아버지, 해병대, "누가 이 나라를 이렇게 키웠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인감도장. 성칠을 대표하는 이 단어들은 너무나도 평면적이라 캐릭터의 발전은 커녕 숨쉴 기회도 허용하지 않는다. <러블리, 스틸>의 순진무구한 러브스토리와 안 맞는 건 당연한 일이고. 오히려 변명하듯 계속 설명을 붙이니 그렇지 않아도 수상쩍은 이야기가 완전히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이 결과가 실망스러운 건 강제규가 바로 얼마 전에 역시 비슷한 입장의 노인을 주인공으로 꽤 좋은 단편을 냈기 때문이다. <민우씨 오는 날>이 바로 그 작품이다. 주인공의 성별과 연령대가 다를 뿐 둘 다 모두 비슷한 주인공의 비슷한 행동을 다루는 거칠고 인공적이고 뻔뻔스러운 신파라는 점에서 거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우씨 오는 날>에는, 모든 것이 얄팍하고 가짜 같은 <장수상회>가 갖고 있지 않은 생명력이 있다.



이 둘을 갈아놓는 차이가 무엇인가 생각해봤다. 답은 하나. '당연함'이다. <장수상회>의 캐릭터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의문을 거부하는 '당연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민우씨 오는 날>에서 그 당연함은 고의로 파괴되어 있다. 그 파괴가 가장 노골적인 건 캐스팅이다. <장수상회>에서는 '아버지' 역으로, 이런 역할에 이골이 난 베테랑 배우 박근형을 캐스팅한다. 하지만 <민우씨 오는 날>에서 노인역은 젊은 배우 문채원에게 돌아간다.

연기는 박근형이 더 잘한다. 하지만 그의 익숙한 연기 속에서 관객들은 생각없이 관습적인 아버지 캐릭터 상에 안주해버리고 만다(그러고 보니 비슷한 일이 십여년 전에도 있었다. 역시 박근형이 주연한 장길수 감독의 1997년 영화로, 심지어 제목은 <아버지>였다.) 하지만 문채원에게 심지어 분장도 시키지 않고 노역을 시키자 그 캐릭터는 노골적인 '망부석' 설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영화는 그 캐릭터에게 '좋은 엄마'나 '좋은 아내' 역할을 주는 것도 거부하는데 그 역시 익숙한 관습을 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허구의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는 한 사람을 만들려면 그 사람을 구성하는 수많은 재료들을 고르고 관절과 이음새를 맞추어야 한다. 이 모든 작업엔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이 필수적이다. 이들을 '아버지'와 같은 큰 틀에 넣고 모든 질문을 차단하면 나오는 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밖에 없다. 이런 것을 다들 이전 세대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오싹할 수밖에.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장수상회>스틸컷 메이킹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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