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장미희, 극장 여배우들의 근사한 앙상블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KBS 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는 김혜자, 장미희 두 여배우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극장을 떠올려야만 한다. 두 배우 모두 텔레비전 브라운관이 아닌 극장을 통해 대중들과 처음 만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 극장은 다양한 듯하나 단조로운 멀티플렉스가 아니다. 어딘가 퀴퀴한 냄새가 나고 어둠은 더욱 짙으며 의자는 딱딱하거나 구멍이 나 있는 그런 오래된 극장이다. 무엇보다 두툼한 장막이 있어 그 막이 스르르 열린 후에야 관객들이 현실 아닌 환상의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그런 극장이다.

물론 두 여배우가 극장에서 환상을 보여주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한쪽은 무대에 올라와 있는 사람으로 한쪽은 스크린에 비치는 이미지로 대중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1963년 KBS 공채 탤런트 1기로 데뷔 연기경력 52년차인 대배우 김혜자는 60년대 연극계의 젊은 여배우로 각광받던 스타였다. 선데이서울과의 인터뷰에서 “해보라고 해서 그냥 했는데 해보니까 좋아서 그냥 했어요.”라고 연기 입문의 계기를 말한그녀는 부조리극인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는 물론 산업화 사회를 풍자한 이근삼의 <국물 있사옵니다>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을 소화한다. 아마 김혜자 연기의 힘인 자연스러움과 긴장감의 극적인 조화는 이 시기를 발판으로 다져진 것이 아닐까 싶다. 김혜자의 연기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흐르다 어느 순간 그녀 주변의 공간 자체를 모두 긴장시키는 힘이 있다.

하지만 브라운관으로 연기의 터를 옮긴 뒤에 그녀는 MBC 드라마 <신부일기>. <전원일기> 등을 통해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만 굳어졌다. 90년대 큰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인 <사랑이 뭐길래>나 <엄마의 바다>, <엄마가 뿔났다>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어머니였다. 이런 엄마의 틀을 김혜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를 통해 깨버린다. 영화 <마더>의 오프닝에서 갈대밭으로 걸어와 춤추는 그 장면 하나만으로 말이다. 이 장면에는 엄마, 살인자, 외로운 여인, 집착하는 여인, 그 외에 수많은 인간이 그녀에게 모두 실려 있다. 이 장면은 영화적이면서도 지극히 연극적인 장면이기도해서 관객은 의자에 앉아 무대에 홀로 올라와 있는 배우와 직접 마주하는 기분까지 든다.



한편 높은 경쟁률을 뚫고 1976년 영화 <성춘향>을 통해 데뷔한 올해로 경력 39년째를 맞은 장미희는 처음부터 스크린의 이미지로 존재하는 여배우였다. 그녀는 현실의 여인이라기보다 현실에서 대중들이 꿈꾸는 아름답고 처연하고 우아한 여인의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70년대 스크린 속의 여인 같기도 한 그녀의 우아한 분위기나 말투는 그녀가 오랜만에 브라운관으로 돌아왔던 MBC드라마 <육남매> 이후 한때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 장미희에게 김혜자와 함께 출연한 KBS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는 과거의 여배우에게 새로운 캐릭터를 입혀준 작품이다. 물론 그 캐릭터는 여전히 장미희인 장미희지만 말이다. 이 작품에서 장미희는 못됐지만 우아하고 어딘지 사랑스러운 면이 있는 시어머니 고은아를 연기한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이 패러디하는 장미희란 낡은 여배우의 틀을 장미희가 직접 연기한 건지도 모르겠다. 작가 김수현의 도움을 받아 장미희가 장미희를 재발견한 셈이다. 이후 장미희는 여전히 장미희지만 장미희 밖에 할 수 없는 연기를 보여주며 많은 드라마에서 때론 우아한 악역으로 때론 처연하게 죽어가는 여인으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엄마가 뿔났다> 이후 두 여배우가 다시 만난 <착하지 않은 여자들>는 두 사람 모두에게 흥미로운 드라마다. 이 작품은 김혜자 장미희 각각이 지니고 있던 과거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다양한 색깔을 덧칠해 활기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안국동 강선생 강순옥을 연기하는 김혜자는 엄마라는 단어에 포함된 다양한 면면을 모두 보여준다. 때론 강하고, 때론 귀여우며, 가끔은 답답하고, 가끔은 잔머리대왕에, 화가 나면 발차기까지 시도하는 그런 우리들의 엄마 말이다. 반면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편에게 버림받은 상처에 아직까지 힘들어하는 여인의 얼굴까지 지니고 있다. 이 엄마이자 여인인 강순옥의 다양한 얼굴을 김혜자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반면 강순옥의 남편 김철희(이순재)가 짝사랑했던 혹은 약간 썸을 탔다고 봐도 좋을 고향 여동생 장모란을 연기하는 장미희 또한 이 드라마에서 빛을 발한다.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장모란은 사실 불륜의 여인은 아니고 남녀 불문 모두 꿈꾸는 어떤 여인의 초상을 지니고 있다. 너무 예쁘고 우아하고 사랑스러워서 가까이가고 싶은 그런 존재 말이다. 한때 그녀의 뒤를 쫓아다녔던 김철희만이 아니라 강순옥의 딸인 김현숙(채시라)이나 강순옥이 모두 은근히 장모란에게 매력을 느끼는 건 그래서다. 이런 미묘한 분위기에 은근히 코믹한 매력까지 더해 장미희는 본인의 매력을 십분 발휘하는 중이다.



이처럼 연기경력 합계 91년이 되는 두 여배우는 전혀 다른 타입이지만 희한하게도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는 근사한 앙상블을 이룬다. 장미희의 연기는 김혜자와의 호흡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김혜자의 연기는 장미희와의 부딪힘을 통해 엄마 아닌 여인의 내면을 보여줄 수 있는 면면이 늘어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연기는 전혀 빛이 바래지 않는다. 장미희의 연기는 어딘지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여인들 같다. 종종 장미희의 연기는 해석하기 어려운 여운을 남긴다. 그 이유는 그녀의 눈빛이 많은 것을 말하는 동시에 알 수 없이 공허해 보여서다. 한편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남편 김철희와의 재회장면을 연기하는 김혜자를 보노라면 피카소의 그림 <우는 여인>이 떠오른다. 한 여인이 원망하고 사랑했지만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남자가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났다. 그 순간 여인이 느끼는 그리움, 원망, 공포, 분노의 감정들이 한순간에 복합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하지만 일그러진 모습 그대로 김혜자의 얼굴엔 모두 드러난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영화 <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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