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거리가 없다고 투덜대는 여성 연예인들에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영화 <피치 퍼펙트>엔 호주 배우 루스 윌슨이 연기하는 팻 에이미라는 캐릭터가 있다. 왜 이름이 그러냐고 질문을 받자 팻 에이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야 너네 같은 말라깽이 여자애들이 뒤에서 나를 놀리지 못하거든.” 팻 에이미에게 자기를 먼저 뚱보라고 부르는 행위는 외부의 시선과 조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복인 셈이다.

코미디 업계는 외모에 핸디캡이 있는 사람들이 연예계에 들어가 스타 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스스로를 못생겼다고, 뚱뚱하다고, 둘 다라고 선언하고 그 선언을 과장하는 것은 이들에게 중요한 무기이다. 그리고 이는 가장 안전한 무기이기도 하다. 조롱의 방향이 남이 아닌 자신을 향한다면 관객들은 안심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농담이 정말 자학이기만 할까? 단순히 자신을 놀려대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위에서 언급한 <피치 퍼펙트>의 예만 봐도 자학이 아니다. 농담의 키를 쥐고 있는 건 팻 에이미이고 공격은 자신이 아닌 자신을 보고 놀려대는 사람들에게 향한다. 여전히 자신의 핸디캡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에 대한 시선을 무시하고 오히려 정면으로 받아치는 것이다. 외모에 핸디캡이 있다고 여겨지는 상당수 코미디언들이 이런 이유로 코미디를 시작했을 것이며 결국 이를 직업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 자신의 외모를 이용한다는 행동은 긍정적인 의미와 이유가 있다.

이들의 코미디는 손쉽기도 하다. 우스꽝스러운 육체는 코미디언들에게 중요한 자산이다. <개그 콘서트>에는 '이 개그맨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코너가 하나 있는데 솔직히 별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직업적 환경을 정직하게 보여준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여기서 평범한 외모의 코미디언들은 관객들에게서 반응을 끌어오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와 소도구를 굴려야 하지만 '어마어마한' 코미디언들은 자기 체중과 음식에 대한 판에 박힌 농담만 해도 충분하다.



하지만 이런 변명은 충분한 알리바이가 되지 못한다. 쉬운 트릭에 안주한다는 건 예술가로서 게으르다는 뜻이다. 자신에게 긍정적인 작업이라도 결과까지 그렇다는 말은 아니며 그들이 희화화하는 대상은 늘 자기만일 수 없다. 그 대상은 같은 핸디캡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을 대표하며 그 사람들이 모두 코미디언일 수는 없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외모 차별을 거쳐 성차별의 문제로 넘어간다. 같은 외모 무기를 사용하는 코미디언이라고 결코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유민상은 '어마어마한' 코미디언으로 분류되지만 지금 <개그 콘서트>에서 그가 맡은 코너에서 그의 체중과 외모는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과연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여성 코미디언들이 같은 조건에 있는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더 큰 문제는 외모가 여성에게 더 빠져나오기 어려운 핸디캡이며 아무리 이를 무기로 삼는 코미디언이라고 해도 이를 대범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한국 여성 코미디언들에게 중요한 시기이다. 업계내의 성차별과 여성혐오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지금이야 말로 스스로의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내 귀에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건 그들이 불만이 없다거나 생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한국 '사회생활'의 규범이 그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나 긍정적인 일은 아니다. 침묵은 동조하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직접 의견을 낼 수 없다면 자신의 작업으로라도 이를 알려야 할 것이다. 그런 작업이 지금까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최근 예를 든다면 이국주의 성공요인은 자신의 외모를 받아들이면서도 일방적인 자학 개그에 빠지지 않았던 당당함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모든 스펙트럼의 영역을 건드릴 수 있는 여성 코미디언들이 얼마나 될까.

여기서부터 주제는 코미디를 넘어 여성이 참여하는 모든 예술분야로 넘어간다. 이는 '스스로를 상상할 수 있는' 여성 예술가들의 상상력의 문제이다. 지금 한국 서사 예술에 참여하는 여성 예술가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여성 자신을 상상하는 범위가 지나치게 좁다는 것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핑계를 만들면서 자신이 만들어내는 여성 캐릭터들의 행동 영역을 제한하며 알아서 지정된 자리에서만 논다. 수많은 여자 배우들이 연기할 거리가 없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당연하다.

소문과는 달리 상상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사고방식의 전환, 훈련, 두려움 극복을 통해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 것이 상상력이다. 그리고 코미디이건 소설이건 연속극이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상상력밖에 없다. 이 중요한 시기에 그 중요한 무기를 방치해놓고 위에서 놀라고 허가한 자리에 주저앉아 틀에 박힌 소리만 반복할 건가? 도대체 언제까지?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SBS, 영화 <피치 퍼펙트>스틸컷,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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