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에 집어삼켜진 임성한 작가의 공과 과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고백하자면 <신기생뎐>이전의 임성한 작가를 높게 평가한다. 그녀의 드라마는 솔직하면서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당시 방송가에 드물던 속물적인 가치관을 우리나라 일일 드라마와 주말 드라마 특유의 ‘가족 드라마’에 접목했다. 전개는 빠르고 힘이 있었으며 중간 중간 버무려진 코미디는 막장도 달게 삼킬 수 있는 당의정이었다. 심각하지만 유쾌한 유머가 임성한의 드라마에는 늘 있었다. 이것이 90년대 후반 작품 활동을 시작해 20여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대중에게 먹히는 자기만의 장르를 완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시청률 40%대의 금자탑을 두세 차례, <압구정 백야>를 제외하면 최소 20%는 넘겼다. 황당할 만큼 콩가루에다 경제적으로 비대칭한 집안이 등장하는 건 막장의 공식이자 임성한 월드를 지지하는 에이치빔이고, 대사에 조사가 빠지거나 술어가 도치되거나 말끝마다 ‘~이야’로 이어지는 특유의 대사들은 임성한 작가를 나타내는 스타일이 되었다. 임성한 작가에게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 고개를 절레절레 긋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그녀의 드라마를 봤을 확률이 높다. 아리영(<인어아가씨>의 장서희)은 연민정보다 훨씬 인지도가 높은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런데 방송통신심의위 방송심의회에 출석한 MBC 관계자가 앞으로 임성한 작가와는 계약을 않겠다는 발언이 보도되자 바로 그 임성한 작가는 아예 은퇴 계획을 밝혔다. 재밌는 것은 2년 전 MBC는 여론의 눈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액의 작가료를 지불하면서 <오로라 공주>를 연장 방영했던 곳이다. <오로라 공주>와 <압구정 백야>는 시청률을 제외하면 설정의 파격과 윤리, 공중파의 품위 측면에선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나름 격세지감이다.

임성한은 누구보다 막장을 ‘현실감각을 가진 드라마’로 잘 활용한 작가였다. 2009년작 <보석비빔밥>은 삼강오륜에 위배되는 막장 가족이 등장한 것 같지만 울음과 웃음, 행복과 고난이 비빔밥처럼 섞여 있다. 속물스런 가치관이 고리타분하지도 않고 솔직해서 막장이라기보다 현실성이 느껴졌다. 지금처럼 막 죽이고 살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자식들이 효성에 입각한 희생보단 현실이치에 맞는 결단을 내리면서 갈등이 벌어졌다. 충분히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자수성가는 이제 낡았다며 요즘 여자들은 판검사든 의사든 개천에서 용 난 ‘개용’은 쳐다도 안 본다는 대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동안 다른 드라마에서 접할 수 없었던 대사와 가치관이 적절한 상황과 대화 속에 있다 보니 선정적이긴 하지만 억지스럽지 않았다. 소재랑 설정은 센듯하나 인과관계와 동기는 확실했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진 샤머니즘 성향이 짙어지면서 작용과 반작용, 인과 관계와 같은 이야기의 구조가 매우 허술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현실 감각은 드라마에 녹아내기보다 드라마 속에서 현실의 여론과 맞짱을 뜨는 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오로라 공주>가 한창 논란이 되자 ‘다른 방송국에서 하는 일일드라마 보냐고 막장도 아니고 너무 훌륭한 드라마고 드라마는 그래야만 한다’는 식의 대사를 넣으며 자신에 대한 비난에 대응하기도 했고, 작가 요청으로 인한 연장에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을 때는 그에 대한 대답 대신 정신적 충격으로 말을 못하는 ‘함묵증’이라는 생소한 설정을 가져와 황당한 전개의 초석을 마련했다. 이슈가 뜨거워질수록 <워킹데드> 보다도 더 많은 주연급 사상자가 그녀의 칼춤 아래 발생했다.

그러는 사이 임성한 특유의 센 설정 안에 자리한 코믹함, 애정어린 등장인물, 현실에 대한 익살스런 이해는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고부갈등, 인과응보, 속물근성, 집안갈등, 얽히는 치정과 로맨스 등 모든 익숙한 상황들을 여전히 다루면서, 그 해결은 알렉산더 왕이 그랬듯 단칼에 뛰어넘어 버린다. 다소 컬트적인 요소와 방식으로. 고약하고 추악한 인간 내면 깊숙한 악마 같은 인간의 본성을 드라마 상황 속에서 드러내는 게 아니라 대사와 죽음 등으로 대놓고 까발려서 던져내는 거다.



문제는 임성한 드라마에서 개연성은 물론이고 이야기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설명조차 필요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기생뎐>에서는 배우 임혁이 할머니귀신, 장군귀신, 5살 동자귀신에 차례로 빙의했고 눈빛 레이저를 썼다. <오로라 공주>에서는 개와 이별수를 보러 철학관에 가기도 하고 두 명은 유체이탈이라는 초자연적인 일로 인해 사망했다. 유체이탈, 의인화, 레이저 발사 등등은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가치관과 메시지를 녹여내는 대신 쉽고 자극적인 선택을 한 결과다. 막장을 잘 이용하던 작가가 그야말로 작법, 스토리, 현실성은 버려두고 막장이란 장르 뒤에 숨었거나 막장에 집어삼켜진 거다.

따라서 임성한 작가를 향한 비난은 잘 정리하고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그녀 드라마의 막장 세계관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다. 다른 작가들도 많고, 인정하든 안 하든 대중과 공유되는 하나의 장르다. 어느 정도 선까지가 막장인지, 그 허용 범위에 대한 논란 또한 늘 시청률에 밀려왔기 때문에 공허하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다. 임성한 작가가 최근 쓴 드라마들이 갖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대중 콘텐츠가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임성한 작가는 2005년 <하늘이시여> 집필 당시 ‘친딸을 며느리 삼는 어머니’ ‘의붓외삼촌과 사랑에 빠지는 조카’ 등 일반적인 가족 관계에서 보기 힘든 설정으로 논란이 벌어지자 “드라마와 영화는 허구의 세계다. 다양한 소재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항변한 적이 있다. 그 후로 10년이 지난 지금, 집필하는 <압구정 백야>는 남편이 죽었지만 시댁에 들어간 주인공 백야(박하나)가 친어머니이자 시어머니가 된 서은하(이보희)와 폭언을 주고받고 복수를 다짐하는 내용이다.



뭐 그때나 지금이나 충격적인 설정이다. 임성한 표 막장드라마가 중장년층 시청자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고 시청률도 괜찮게 나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이유는 설정의 문제가 아니다. 황당한 설정을 어떻게 드라마로 풀어내는지 그 방식에 시청자들이 더 이상 예전처럼 동의하지 않는 거다. 설정이 막장인 게 문제가 아니라 진행 방식이 막장이라서 문제가 되는 거다.

온갖 여론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준 것은 시청률이었다. 하지만 점점 야위어가는 드라마의 구조, 점점 헤어진 그물코처럼 허술해지고 거칠어지는 전개, 우려내는 대신 점점 자극적인 조미료가 가득한 대사들이 은퇴를 거론하게 할 만큼 시청률의 제왕의 발목을 잡았다. 막장도 장르고,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분명한 한 가지 코드다. 하지만 최소한의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무시하고, 더 자극적인 방편은 쉽고 빠르게 찾다보니 막장의 개념은 설정을 넘어서 ‘이야기’의 존재까지 넘보는 수준으로 커졌다.

컬트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는 또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나 고민되지만, 황당무계함만 남은 곳에 서사는 필요 없다. 안 되면 또 다른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 되니까 말이다. <압구정 백야>는 이에 대한 나름의 심판인 셈이다. 도저히 여기까진 안 되겠다는 판단이다. 2010년도 이전 드라마에서 보여준 비유하자면 몸에는 나쁘겠지만 정말 맛있는 그녀 드라마만의 오묘하고 깊은 맛이 아쉽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MBC,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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