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영화 제목을 왜 이렇게 바꿨을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영화를 이루는 수많은 요소들 중 가장 연약한 것은 제목이다. 아무리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이 꼼꼼하게 내용에 어울리는 제목을 지어도 수많은 변수가 그들의 선택을 망쳐놓기 마련이다. 제목은 고치기 쉽고, 마케팅 팀에 쉽게 흔들리며, 무엇보다 종종 번역되기 어렵다.

번역제목의 경우 온갖 호러 이야기가 있다. 가장 노골적인 것은 모르고 오역한 제목인데, 이건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는 거 같다. 모르고 하는 실수는 자연재해에 가깝다. 번역자의 질을 높이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겠지만 원론에 가까울수록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오역임에도 불구하고 고수할 수 없었던 제목들이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대표적인데, 이 영화의 원제인 ‘Dead Poets Society’의 Society가 사회가 아니라는 건 내용만 조금 들여다봐도 알 수 있지만 (대사 번역에서는 '죽은 시인 클럽'으로 번역됐다) 영화가 소개되기 전에 오역된 제목이 너무 유명해져서 바꿀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수입업자가 지나치게 소심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비디오 시절엔 전혀 연결되지 않는 작품들이 속편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바운드>나 <피아노> 같은 영화들은 속편이 없고 나올 수도 없는 영화지만 겁에 질린 수입업자의 손에 걸리면 가차 없다. <바운드>는 그래도 유사 아류작이 나올 수 있는 장르물이지만 <피아노>와 어떤 연결고리도 없는 샐리 포터의 ‘The Man Who Cried’를 <피아노 2>라고 번역하는 배짱은 어디에서 왔을까?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번역도 할 필요없이 멀쩡하게 옮겨지는 제목이 수입업자의 어처구니 없는 미신 때문에 왜곡되는 경우이다. <아멜리에>가 대표적인데 이 영화의 원제는 <아멜리 풀랭의 환상적인 운명> 정도로 직역되는 ‘Le Fabuleux destin d'Amélie Poulain’이고 영어권에서는 ‘Amelie from Montmartre’ 또는 그냥 ‘Amelie’로 알려져 있다. 충분히 번역될 수 있는 제목이지만 귀찮으면 그냥 <아멜리>라고 옮겨도 된다. 하지만 4글자 제목이 장사가 잘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미신 덕택에 우리의 아멜리는 족보에도 없는 아멜리에라는 이상한 이름을 달게 된다. 수입업자의 농간을 극복하기 위해 KBS 더빙판에서는 <아멜리>라는 제목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한 적 있으나 이 시도는 곧 잊혀진다. 결국 우리나라에서만 아멜리는 아멜리에로 강제 개명된 상태다.



번역제가 아닌 일반 제목의 강제 개명의 예도 많다. 그 중 대부분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시나리오 작업 때는 <더 바디>였던 제목이 <무덤까지 간다>로 바뀌었다가 개봉 직전에 <끝까지 간다>가 된 이유를 우리가 굳이 추적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멀쩡한 제목이 개악이 되는 이유를 알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최근 제목 때문에 논란이 되었던 건 한준희의 <차이나타운>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원래 <코인로커 걸>이었다. 도입부 설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아주 독창적인 제목은 아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코인로커 베이비스>와 밀접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영화가 택한 <차이나타운>에 비하면 이 제목은 준수하다. <차이나타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미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동명 걸작 영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카피 제목이 그렇듯 이 영화는 등장하자마자 인터넷의 검색 공해물이 되어버렸다. 다른 동료 검색 공해물로는 <순수의 시대>, <무방비 도시>, <오만과 편견>, <이브의 모든 것> 등등이 있다.

왜 제목이 바뀌었을까. 얼마 전에 그와 관련된 뉴스를 읽었다. 내부 시사회 결과 <코인로커 걸>이란 제목에서 코미디가 연상된다거나 심지어 '로커'가 등장하는 음악영화라는 반응까지 나왔다나.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여러분은 이 자체가 농담이라고, 실없는 코미디 설정의 일부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코인로커'에서 로큰롤을 연상할지도 모르는 가상의 바보가 어떤 바보의 머릿속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원래 제목을 버리고 고전 영화의 카피 제목을 선택한다? 이게 말이 되나?

바보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들이 하한선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가상의 바보인 경우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이건 꼭 영화 제목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차이나타운><아멜리에>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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