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문’, 단맛 속 쓴맛 나는 블랙코미디 드라마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SBS 월화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는 방송 초반 보여준 달콤한 드라마의 문법들을 모두 내던진 지 오래다. 경쾌한 템포는 보는 이의 신경을 긁는 느릿느릿하고 음산한 걸음으로 바뀌었다. 이야기의 흐름의 중심이 되는 사건들은 파편으로 흩어져서 집중하지 않으면 그 맥을 놓치기 딱 좋다. 하지만 그 파편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는 기존의 드라마들과는 다른 쓴맛의 재미를 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풍문>은 의도적으로 드라마가 줄 수 있는 달콤한 쾌감을 맛보기로만 살짝 던져준 것이 아닌가 싶다. 초반의 달콤한 재미는 당의정이었을 뿐 이미 그 안에 깊은 쓴맛을 품고 있었다고 할까? 마치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 각각이 가짜 얼굴과 진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초반 상류층 부부지만 종종 헛발질이라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던 한정호(유준상)와 최연희(유호정) 부부부터가 그러하다. 그들은 <풍문>의 분위기가 어두워질수록 점점 괴물 같은 실체를 드러낸다. 그들은 손자 진영이의 엄마 여고생 서봄(고아성)을 며느리로 대하고 그녀의 재능을 발견해 사법고시를 보게 할 생각이었다. 그 사이 잠시나마 서봄의 지혜와 학습능력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역시나 이종교배를 두려워해서는 발전이 없어.” (한정호)

하지만 법무법인 한송 때문에 부당해고를 당한 서봄의 삼촌 서철식(전석찬)이 역시나 같은 부당해고 피해자인 오빠를 둔 한송 비서실 직원 민주영(장소연)의 은밀한 도움으로 개인소송을 진행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에 서봄과 아들 한인상(이준)이 부리는 집안사람들의 파업을 지지하자 서봄은 집안의 암적인 존재가 된다.



물론 이야기를 되짚어보면 처음부터 죽 서봄은 한정호와 최연희 부부에게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들과 한 식탁에 밥을 먹을 수 있는 계급의 여자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집안과 어울리도록 서봄을 포장한다. 시어머니는 명품옷을 입히고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법률에 대한 재능을 북돋는다. 허나 이건 서봄을 위해서가 아닌 서봄을 그들에 맞게 포장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풍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서봄 또한 드라마의 기대와는 어긋나는 행보를 보인다. 가장 일반적인 드라마의 패턴이라면 가난한 집안의 서봄이 사랑스러움과 지혜로움으로 부유한 시댁 한정호 집안의 분위기를 바꿔놓는 흐름이 될 터였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서봄은 사랑스럽지는 않다. 서봄의 언니나 아버지처럼 순진하게 남을 쉽게 믿는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 순진하셔. 그래서 슬퍼.” (한인상이 자신의 장인어른에 대해 하는 말)

“그거 짱 슬프지.” (서봄)

또한 서봄은 여고생의 나이로 임신을 하면서 세상의 시선이란 게 어떤 것인지도 몸소 겪어본 아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한데요. 저는 그걸 겪어 봤잖아요.” (서봄)



그런 까닭에 서봄은 영민하지만 눈치보고, 눈치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그 질문을 통해 조금씩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인물이다. 다만 그런 서봄의 행보를 <풍문>은 명확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녀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는 주변의 상황, 그녀의 표정, 그녀가 조심스럽게 흘리는 대사들을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오해의 소지를 살 여지가 많은 여주인공이다. 능력 있는 시어른들께서 키워줬더니, 상류층의 즐거움을 기꺼이 누리다가, 결국 상투 잡는 버릇없는 며느리로 말이다. 하지만 <풍문>의 흐름 속에서 서봄은 사실 단맛 속의 진짜 쓴맛을 발견하는 대견한 인물이다.

“힘의 정당성과 실재성. 네가 그 간극을 보고 있구나.” (경태, 한인상과 서봄의 과외선생)

그리고 서봄은 그 쓴맛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는 더 바보 같았어. 힘의 속성을 너무 잘 알아서 그 앞에 엎드렸잖아. 힘의 힘을 믿고 까불었잖아. (과외선생에게)그게 진짜 굴복 아니에요?”

<풍문>의 여주인공 서봄이 느끼는 쓴맛은 서봄만이 아니라 어느새 드라마를 보는 우리의 입가에도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그건 <풍문>이 보여주는 어떤 아이러니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상류층의 천박하고, 속물적이지만, 겉보기에는 그저 쿨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아이러니. 자신이 잃은 것을 되찾으려는 평범한 인물들은 겉보기에 억세고, 음흉하고, 탐욕스러워 보이는 아이러니. 신뢰 같은 인간적 관계들이 돈과 권력이라는 카드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러니.



이런 아이러니가 극대화된 장면이자 드라마 <풍문>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은 함께 소송을 모의하는 서철식과 민주영의 공원 벤치 데이트 장면이다. 두 사람은 한송에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연인으로 위장한 사이다. 하지만 소송 건이 진행되면서 두 사람에게는 미행이 따라붙는다.

“데이트족처럼 말해주세요. 둘러보지 마시고요. 내용은 상관없어요. 공원이라 도청은 안 되니까. 제가 한송에서 특정업무 진행하면서 자주 도움 받던 동기가 있거든요. 친구 말이 저 미행 대상자 명단에 다시 들어갔대요. 5미터 간격으로 뒤따르다 멈췄고요. 우리가 여기 떠나면 CCTV확인할 거예요.”

“한대표 부탁입니까?”

“직접은 아니에요? 저는 내부고발자 가족이라 누가 지시해도 이상할 게 없으니까, 하하하.”

“하하, 이런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라고요?”

“해보세요. 저처럼요. 하하.”

“아휴, 이상해요.”

“하다보면 되요, 하하.”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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