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뢰한’, 사납고 팔자 나쁜 순정녀의 마지막 한 방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무뢰한>은 살인범을 잡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고 접근한 형사와 살인범의 애인 사이에 오가는 대단히 모호하고 질척이는 감정을 그린 신파이다. 영화는 전도연의 완벽한 연기에 힘입어 그 짧지만 끈덕진 감정의 편린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데, 장면의 구성이나 조명, 카메라 워크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정교하고 스타일리시 하게 배치되어 있다.

◆ 오페라의 서곡처럼 영화 전체를 암시하는 도입부

영화는 시작한지 두어 장면 만에 이미 영화가 품고 있는 모든 정서를 암시한다. 푸르스름한 새벽녘에 건들거리며 걷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는 형사 신분증을 보이며, 사건 현장에 들어선다. 그가 정재곤(김남길)이다. 곧바로 장면이 바뀌어 박준길(박성웅)이 여자의 아파트에 들어선다. 그는 어둠 속에서 자신이 황충남을 죽였노라 털어놓는다. 다시 사건 현장, 누워 있는 시신 위에 이불이 덮여 있다. 순경 왈, 현장 보존을 해야 하는데, 피해자 애인이 시신을 바닥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고. 여자가 하도 사나와 말릴 수가 없었다고. 정재곤이 그 사납다는 여자를 바라본다. 팔자 드세게 험한 꼴을 본 여자, 그래도 무슨 순정으로 길바닥에서 칼 맞은 애인에게 이불을 덮어준 여자.

물론 그 여자는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은 살인자 박준길의 애인 김혜경(전도연)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또 다른 김혜경이다. 김혜경 역시 무수히 많은 여인들 중 하나이다. 강력 범죄의 언저리에 있는, 그 ‘사납고 팔자 나쁘고 순정 있는’ 여인들 말이다. 영화에는 그러한 여인들이 여럿 등장한다. 황충남의 애인, 박준길의 애인, 목포에서 정재곤에게 몹쓸 취조를 당했다는 여인, 그리고 후반부에 치아가 몽땅 빠진 몰골로 정재곤에게 김혜경을 떠올리게 한 여인 등등.

<무뢰한>은 그러한 여인들에 관한 영화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뻔한 사연으로 뭉뚱그려지는 여인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형사의 귀찮은 방문을 받는 범인의 연인이거나, 탈주범 사건이 보도될 때 마다 범인을 숨겨주었다는 후일담에 등장하던 여인들. 사건이 있기 전부터 그 세계에 있어왔고, 사건이 끝난 후에도 더 나쁜 상태로 살아갈 것 같은 여인들. 언제나 그들과 범인들 간의 끈끈한 애정이 궁금하였지만, 우리의 관심밖에 놓여있던 여인들. <무뢰한>은 정재곤의 눈을 통해 가만히 들여다 본 그 ‘김여인’에 관한 영화이다. 정재곤이 자신의 정보원을 찾기 위해 쪽방에 들어섰을 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던 방안에 무수히 많은 남자들이 우글우글 엉켜있던 것처럼, 영화는 잘 보이지 않던 어두운 그 세계에 정재곤을 들여놓고 질퍽하고 끈덕진 정서를 맛보게 한다.



◆ 엿보다 마주친 어떤 순정

정재곤 역시 대충 피폐한 남자이다. 나랏일 할 것 같은 관상에, 형사와 범죄자가 구분되지 않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올곧은 형사님이 아니다. ‘스폰’도 받고, 거래도 하고, 기선 제압하느라 폭력배보다 더 폭력배처럼 군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가 하면, 껄렁거리고, 범인의 애인에게는 성추행도 불사하는 무뢰배다. 그런 그가 단란주점 영업부장 이영준으로 위장한 채, 김혜경을 사찰하며 그녀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닳고 닳아 강단 있어 보이지만, 외로움에 흔들리며 겨우겨우 힘들게 버티는 여자. 태연히 장을 보고 요리를 하지만 홀로 울며 음식을 버리는 여자. 정재곤은 김혜경을 통해 아주 오랫동안 자신과 무관하게 여겨졌던 어떤 순정과 마주한다.

김혜경은 화류계 생활 10년 만에 빚만 남은 여자이다. 빚지기 전에는 뭐 했냐는 물음에 “빚 얻으러 다녔다”는 대답은 가장 솔직하고 쓸쓸한 그녀 인생의 요약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사람까지 죽인 박준길을 사랑하지만, 그는 김혜경을 저당 잡힌 채 도주 중이다. 그는 그녀의 삶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사람이지만, 지금 그녀를 지탱하게 해주는 유일한 사랑이다. 김혜경은 그에게 도주 자금을 마련해주고자 한다. 그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가 원하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남자들에 둘러싸여 체념한 듯 살아가면서도 속 깊은 애정을 갈구하는 그녀를 보며, 정재곤은 일렁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존감을 챙길 수 없는 만큼 밑바닥에 놓인 김혜경이 남자들의 위계질서 속에서 무시당하는 이영준을 보호하려 애쓰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런 김혜경을 보며 정재곤은 퇴폐적인 연민이 아닌 인간적인 우애를 느낀다. 그에게 김혜경은 대상화된 여성이 아니라, 나름의 인격과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행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김혜경을 취조하려는 동료들로부터 김혜경을 구해준다. 그의 인식과 태도가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거짓말 하는 사람의 진실

새벽녘 김혜경의 집에서 두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대화에는 영화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 대화는 두 사람이 각자 의도를 숨긴 채 나누는 대화라는 점에서 보면 거짓이다. 그러나 대화의 내용을 보면 그 어떤 연인의 첫날밤보다 진실 되다. 그들은 “상처 위에 또 상처, 더러운 기억 위에 더러운 기억”을 쌓으며 살아온 날들을 말한다. 이를테면 ‘거짓말 하는 자의 진실’이 묻어 있는 것이다. 정재곤이 김혜경의 머리맡에 귀고리를 놓는 행위에 연정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보긴 힘들다.

그러나 정재곤에게 그의 신분을 상기시키는 전화가 걸려온다. 김혜경은 들뜬 목소리로 잡채를 버무리며, 장난처럼 같이 사는 것에 대해 말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미묘한 파장을 지닌 채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교차되다 “내 말 믿지마”라는 정재곤의 말로 허공에 흩어진다. 김혜경은 “아니야, 진짜 같아”라는 말로 가까스로 붙잡는다. 여기서 정재곤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그도 역시 사랑을 느꼈을 테지만, 자신의 진심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재곤은 가장 끔찍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김혜경 앞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김혜경이 자신에게 품었던 마음을 알기에 되도록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자신의 거짓을 드러낸다. 김혜경은 외마디 비명처럼 “당신 진짜 이름이 뭐에요?”라며 울부짖는다. 정재곤에게 그것은 또 하나의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몇 달 후 정재곤은 김혜경처럼 손목에 흉터를 지닌 여자를 보고 김혜경을 찾는다. 김혜경은 “나는 요리를 잘 하니까. 다른 여자들처럼 살고 싶다”는 희망사항의 가장 애꿎은 실현태인 ‘약쟁이 간병인’이 되어 있다.



정재곤이 김혜경을 다시 찾은 이유는 김혜경의 마지막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정재곤은 자신의 본명과 신분을 똑바로 말해주며, “난 당신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내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상처를 부인함으로써 상처를 거부하는 방식. 그러나 그 말은 김혜경을 가장 분노시키는 말이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미묘한 감정들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거짓말 하는 사람의 진실’까지 원천무효화 시키는 말에, 김혜경은 “나쁜 새끼”라며 치를 떤다. 그리고 정재곤의 마음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처를 온전히 몸 위로 끄집어내어 생생한 상처로 만들어준다.

김혜경이 정재곤에게 준 선물은 자신의 감정을 모조리 부인당한 것에 대한 진실한 응답이자, 상처를 몸 위로 불러내어 스스로 말하게 하는 방식이다. 김혜경은 자신만이라도 그 짧고 모호한 순간에 품었던 애틋하고 질척이는 감정들을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들지 않게 하려는 격한 몸부림이다. 이것이 사납고, 팔자 나쁘며, 순정 있는 여자의 마지막 한 방이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받으며, 시종 무뢰한이었고 잠시 진실에 흔들렸으며, 마지막에 진실의 항변에 허를 찔린 채 상처가 전하는 생생한 고통을 수긍하며 비척거리는 사내 위로, ‘무뢰한’이라는 타이틀이 뜬다. 영화가 시작된 지 처음으로 뜬 제목이다. 이러한 엔딩은 새벽녘 정재곤의 걸음으로 시작된 이 영화의 구조적 완결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끝이자 시작. 그에겐 다른 삶이 있을까. (혹은 ‘어둠의 자식들’인 우리들에게 구원이 있을까....)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무뢰한>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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