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 찬스’, 기회를 잡는 건 언제나 인간의 몫이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세컨 찬스>는 도덕적 딜레마를 담은 심리 스릴러이다. 정의로운 형사 안드레아스는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한 집에서 똥오줌에 범벅이 된 채 방치되어 있는 아기를 보고 분개한다. 아이 아빠는 안드레아스에게 검거된 적이 있는 마약중독자 트리스탄. 그는 가석방 후 산느의 집에 머물면서 아기를 돌보려는 산느를 때리며 폭군처럼 군다. 안드레아스는 방치된 아기를 부모로부터 떼어놓아야 한다며 법적인 조치를 알아보지만, 개입이 쉽지 않다. 안드레아스가 방치된 아기에게 특별히 신경 쓰는 이유는 그도 아기를 키우는 아빠이기 때문이다. 안드레아스와 안나는 소중한 아기를 잘 키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좋은 부모이다. 그러나 아기 돌보기가 쉽지만은 않다. 밤마다 깨서 우는 아기를 재우느라 안드레아스는 밤잠을 설치고, 안나는 육아 스트레스로 심신이 지쳐있다.

◆ 학대 받는 아이에게 오히려 구원이 아닐까?

어느 날 밤, 안나가 미칠 듯 한 비명을 지른다. 아기가 숨을 쉬지 않는 것이다. 안드레아스는 아기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며 구급차를 부르려 하지만, 안나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안나는 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우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보인다. 안드레아스는 안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죽은 아기를 안고 나와 배회하다가 트리스탄의 집 앞에 멈춰 선다. 그는 극도의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도덕적인 선을 넘고 만다. 마약에 취해 잠든 트리스탄과 산느 몰래, 화장실 바닥에 똥 범벅이 되어 누워있는 아기를 죽은 자기 아이와 뒤바꾼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옳다고 생각하였다. 일단 모두를 위해 나쁘지 않다. 아기에게는 끔찍한 학대에서 벗어나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갑자기 아기를 잃고 멘붕에 빠진 안나에게도 정신을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셈이다. 그럼 트리스탄과 산느에게는? 저들은 아마 아기가 바뀐 것도 모를 것이다. 차라리 아기가 죽었다고 알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아기를 키울 능력도 의지도 없는 자들이니까.

안드레아스의 이러한 판단의 바탕에는 자신의 바꿔치기보다 더 부당하고 폭력적인 게 따로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바로 신 혹은 운명 말이다. 우리 부부처럼 금지옥엽 아기를 키운 부모에게는 갑작스러운 아기의 죽음이라는 날벼락이 떨어지고, 아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모른 채 방치하는 저 쓰레기 같은 부모의 아기는 오히려 별 탈 없이 살아있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으며 완전히 불공평하고 몹시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안드레아스의 판단은 오만한 것이었다. 사태는 그의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아내의 상태는 종잡을 수 없어지고, 죽은 아이를 발견한 트리스탄과 산느도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 사태는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안드레아스는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둔중한 깨달음을 얻는다.



◆ 과오를 교정할 수 있는 ‘세컨 찬스’

아기의 시신을 부검한 의사는 “흔들린 아기 증후군(shaken baby syndrome)이 사인이며, 살인죄로 기소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기를 키울 자격도 없어 보였던 트리스탄과 산느가 아니라, 좋은 부모로 자부해 온 자신과 아내가 바로 부주의하게 아기를 죽게 만든 범인이라니! 안드레아스는 미칠 듯 한 혼란에 빠져 아기와 함께 잠적한다.

그가 아기를 바꿔치기 한 것은 비록 선의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명백한 실정법의 위반이다. 그런데 신학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그가 품었다는 선의야말로 죄다. 인간인 그가 마치 신 인양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행위와 운명을 재단하는 오만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세컨 찬스’가 주어진다.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그 기회 말이다. 동료 형사 시몬은 그에게 사태를 바로 볼 수 있는 혜안과 조언을 제공한다. 시몬 역시 이혼한 전처와 멀어진 자식으로 인해 도덕적 자포자기의 길을 걷던 형사였다. 그러나 영화 중반 그는 스스로 지난날을 청산하고 총기를 되찾는다.

아기를 산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시몬의 말에 안드레아스는 여전히 아기의 앞날을 걱정하며 주저한다. 시몬은 “자네 손을 떠난 일이야”라며 인간적인 윤리의 선긋기를 한다. 안드레아스는 마침내 산느에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실정법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세컨 찬스’를 얻는다. 영화는 에필로그처럼 산느에게도 ‘세컨 찬스’가 주어졌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눈으론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새로운 삶이 산느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끝까지 죄와 거짓에 물든 채 산느를 재물로 삼으려던 트리스탄과 스스로 자신을 수습할 힘을 갖지 못했던 안나에게는 ‘세컨 찬스’가 주어지지 않는다.



<세컨 찬스>는 한편의 종교적인 우화처럼 보인다. 스스로 정의로운 인간이자 좋은 부모라 생각한 주인공이 내딛는 도덕적 패착을 통하여, 영화는 옳고 그름에 대한 인간의 정의가 얼마나 편협하고 오만한지를 일깨운다. 또한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에게 자신의 오류를 바로 잡고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세컨 찬스’를 선사하며, 이를 통해 구원의 실마리를 내비춘다. 영화는 종교적인 색체를 전혀 띠지 않은 심리 스릴러이지만, 주제의식 면에서 보면 어떤 종교영화보다도 종교적이다. 영화에서 세속적인 법의 작동은 신학적인 차원의 죄와 보속의 과정과 맞물린다. 이를 통해 영화는 심오하고 영적이며 풍부한 해석과 여운을 남기는 텍스트가 되었다.

지금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혼돈에 빠져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세컨 찬스’가 있다. 신의 위치에서 판단하는 오만을 버리고, 인간의 위치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할 지어다. 기회를 주는 것은 신의 은총이요, 그것을 잡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세컷 찬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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