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함 사라진 ‘프로듀사’ 믿을 건 김수현밖에 없었나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마음을 편히 내려놓고 보면 KBS 예능국의 드라마 <프로듀사>가 그렇게 재미없는 작품은 아니었다. KBS1 일일연속극보다 덜 진부하고 KBS2 보다야 현대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몇몇 실패한 KBS의 시트콤들을 닮은 유치하면서도 지루한 소품도 아니다.

우선 차태현, 공효진, 김수현, 아이유 등 주연배우들의 합이 생각보다 좋은 편이다. 이 개성 강한 네 명의 스타들이 한 작품 안에서 꽤 그럴싸하게 어울릴 줄은 몰랐다. 인물들 간의 미묘한 심리적 호흡을 한 장면에 잡아내는 표민수 PD의 솜씨도 여전하다. KBS 주말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 이어 SBS <별에서 온 그대>까지 홈런을 친 박지은 작가의 재기발랄함은 이번에는 KBS 예능국이라는 공간에 갇혀 좀 무뎌진 것 같다. 아니면 작가 특유의 유머코드가 이제는 익숙해져서 지루하게 다가오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실제 예능국 PD들의 유머코드가 지극히 꼰대 같아서 그걸 리얼하게 살리다보니 썰렁한 장면들이 종종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아무튼 <프로듀사>는 예능국 PD들의 직장인으로서의 삶과 꿈을 그리겠다는 애초의 의도와는 멀어졌다. 오히려 <프로듀사>의 1화 타이틀처럼 본의 아니게 예능국에 가깝다. 이 드라마에서 그리는 예능국은 표피적이고 익숙해서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즉 박지은 작가의 전작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나 <별에서 온 그대>에서 방송국을 드라마의 배경 정도로 그려낼 때보다 분량은 늘었지만 깊이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이렇다보니 <프로듀사>에서 박지은 작가의 장점이 드러나는 부분은 예능국의 내부를 그릴 때가 아니다. 네 주인공 라준모(차태현), 탁예진(공효진), 백승찬(김수현), 신디(아이유) 사이에서 오가는 연애감정을 풀어갈 때다. 이 예능국 방송국 PD들 그리고 얼음공주지만 알고 보면 마음 여린 아이돌이 누군가에 대한 설렘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오해하고, 결국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들은 재미지다. 다만 처음 이 드라마의 주인공 신입PD 백승찬(김수현)이 KBS에 입사할 때 기대했던 그런 재미는 아니다.

더구나 <프로듀사>를 보다보면 희한하게 이것저것 성공한 예능프로그램의 코드를 엮어 만들었지만 내용 없는 공허한 예능프로그램이 떠오르기도 한다. <프로듀사>는 수많은 성공작 드라마들의 코드를 따온 작품이다. 박지은 작가의 성공한 드라마들과 공효진, 차태현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나, 표민수 PD가 연출했던 <그들이 사는 세상>에 대한 기시감이 순간순간 빠르게 지나간다. 혹은 샐러리맨의 삶을 관찰카메라처럼 미세하게 파고들었던 TVN의 <미생>도 떠오른다.



하지만 각각의 드라마들이 지닌 인상 깊었던 코드들을 모두 따와 하나로 엮어놓으니 정작 KBS 예능국과 스타작가와 스타배우와 아이돌이 함께 손잡고 만든 드라마는 맨송맨송해진다. 과연 <프로듀사>가 KBS 예능국이 제작한 특별한 드라마라고 내세울 만큼 개성 있거나 완성도 있는 드라마였는가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그나마 이 드라마에서 신선했던 부분이라면 신입PD 백승찬을 맡은 김수현의 연기방식이 아닐까 싶다. 흥미롭게도 함께 연기하는 공효진, 차태현, 아이유와 김수현은 연기방식이 다르다. 다른 주연배우들의 경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평소 캐릭터를 그대로 살리면서 각 작품에 맞게 조금씩 변주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김수현은 배우 자체의 캐릭터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프로듀사>를 보면 신기하게도 이 이십대 중반의 신입PD 백승찬에게서 외계인 도민준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물론 액받이무녀를 사랑하는 조선시대의 왕, 사투리 쓰는 아이돌 지망생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배우 김수현의 모습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스펙도 좋고 외모도 좋고 승부욕도 있지만 순발력은 떨어져서 종종 맹구처럼 여겨지는 신입사원 백승찬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조금 더 섬세하게 백승찬의 움직임과 감정의 흐름을 관찰해보면 그제야 배우 김수현이 보인다. 물론 배우 김수현의 마스크가 아니라 김수현이 백승찬을 보여주기 위해 작업한 세세한 프로듀싱이 보인다는 거지만.



다만 김수현이 설득력 있게 연기한 백승찬을 너무 믿은 탓인지 <프로듀사>는 후반부에 이 신입PD를 너무 설득력 없게 부려먹는다. 여주인공 신디가 백승찬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탁예진이 백승찬의 감정을 쉽게 눈치 못 채는 것도 조금 작위적이고 재미없는 설정이긴 하다만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프로듀사>의 백승찬은 어느 순간부터 예능국 PD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 상의 연애감정을 위한 소도구로 전락한 듯한 인상이다.

백승찬이 탁예진에게 건네려다 실패한 말하는 소원판다 인형처럼 말이다. 더 나아가 <프로듀사> 전체가 이 소원판다 인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거기에서 들리는 건 이미 녹음된 목소리일 뿐 기대했던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는 아니다. 물론 예능은 리얼이 아니고, 어쩌면 <프로듀사>는 예능국 PD들의 삶을 <1박2일>, <산장미팅>, <여유만만> 같은 예능의 방식으로 가볍게 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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