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수애를 둘러싼 남자들이 더 빛나는 이유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SBS 수목드라마 <가면>에서 정치인 집안의 눈엣가시 딸인 서은하(수애)는 까칠 냉정 도도한 인간이다. 반면 서은하와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인 백화점 판매원 변지숙(수애)은 열심히 살아가려는 따뜻한 인간이다. 서은하의 죽음 이후 이 인간미 넘치는 변지숙이 돈과 권력이란 서은하의 가면을 썼을 때 어떤 사람으로 변하게 될까? <가면>은 익숙하지만 언제나 흥미로운 그런 질문을 던져주듯 첫 테이프를 끊었다.

하지만 테이프를 끊은 순간을 결승선을 끊은 순간으로 착각한 걸까? 드라마는 날이 갈수록 느슨하고 방만해진다. 세상을 뜬 서은하를 연기하게 된 변지숙은 오히려 과거의 그녀들보다 더 한심하게 느껴진다. 드라마는 변지숙의 순수함과 청초함을 보여주고 싶겠지만 보는 이들의 눈에는 눈구멍이 제대로 안 뚫린 가면을 쓰고 버둥대는 답답한 모습으로 다가올 따름이다.

<가면>은 현재까지 도도한 서은하의 가면을 쓴 답답이 변지숙을 통해 우연과 억지가 반복되는 사건을 집어넣으면서 꾸역꾸역 이야기를 이어간다. 가끔은 진지한 장면 뒤에 어설픈 유머 장면이 이어지면서 당황스러움을 안겨준다. 하지만 <가면>에서도 드라마의 완성도와는 상관없는 흥미로운 지점이 있기는 하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 수애가 연기하는 서은하/변지숙은 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가면이다. 여자 사람이 아니라 남자들이 이상적으로 꿈꾸는 여자가면 말이다. 마치 수많은 로맨틱코미디 속 남자들이 진짜 무덤덤한 남자 사람들이 아니라 여자들이 꿈꾸는 남자가면이듯 말이다.



<가면>에서 여주인공은 세 개의 여자가면을 쓴다. 누나, 모성, 팜므파탈. 그리고 그 세 개의 가면을 욕망하는 인물인 세 남자 변지혁(호야), 최민우(주지훈), 민석훈(연정훈)이 있다. 이 남자들은 서은하나 변지숙의 진짜 모습이 아닌 그들이 믿는 가면으로서의 그녀만 바라본다. 그리고 의외로 이 여자가면을 바라보는 남자 인물들은 여자가면과는 달리 꽤 리얼리티가 살아 있다.

<가면>에서 누나와 함께 답답이 유전자에 사고치기 유전자까지 덤으로 물려받은 변지혁은 누나를 늘 위기에 밀어 넣는 존재다. 그는 앞뒤 상황 파악도 안 되고 평소에는 누나에게 틱틱대기 일쑤다. 변지숙이 죽음의 위기에 몰려 연락이 안 될 때도 술 취해서 뻗었을 거라며 툴툴거릴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죽은 줄로만 알았던 누나가 서은하로 살아 돌아오자 어떻게든 진짜 누나 변지숙이라는 걸 밝히려고 안간힘 쓴다. 심지어 서은하/변지숙이 내민 어마어마한 오 억을 찢어발기며 누나가 주는 돈이 아니면 안 받겠다는 패기까지 부린다.

변지혁이 이토록 절실하게 누나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본인이 어떤 사고를 치던 받아주는 방어막이 누나였기 때문이다. 그 누나가 사라지자 변지혁은 홀로 모든 걸 판단해야 하는 길 잃은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그에게 변지숙이라는 누나가면은 언제 길을 건너야할지 말아아할지 알려주는 신호등과 다름없는 존재인 셈이다.



드라마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최민우가 바라는 여자가면은 변지혁과 비슷한 듯 미묘하게 다르다. 최민우가 처음 정략결혼 대상자인 서은하를 만난 건 자신의 회사 백화점의 VVIP 패션쇼장이다. 이곳에서 최민우는 서은하가 바라는 모든 옷을 다 고르라고 한다. 최민우에게 서은하는 그가 살아가는 자본의 세계의 파트너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서은하/변지숙은 과거의 서은하가 아니다. 까칠 냉정 도도가 아니라 맹하고 모든 일에 서툰 성격으로 변했지만 남자인 그에게만은 따뜻하게 대한다. 마치 엄마처럼. 그리고 최민우는 그 서은하/변지숙을 사랑하게 된다.

첩의 아들이지만 대기업의 승계자인 최민우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더구나 어린 시절 엄마가 호수에서 익사한 뒤로는 물에 대한 공포증에 시달린다. 땅이 포근한 모성을 상징한다면 물은 알 수 없는 모성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물은 깊이를 알 수 없고 그것이 편안한지 자신을 익사시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최민우는 서은하/변지숙의 촉촉한 호수 같은 눈에 담긴 자신의 모습인 눈부처를 보고 편안함을 느낀다. 그 후 모든 일에 불안해하던 최민우는 서은하/변지숙 앞에서는 차츰 안락한 사랑의 기분을 아는 남자로 변해간다.

반면 과거 서은하와 연인관계였던 민석훈이 여자가면을 욕망하는 태도는 가장 독특하다. 이 드라마에서 실질적인 복수의 화신은 사실 변지숙이라기보다 민석훈이다. 무슨 이유인지 드라마 상에서 확실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는 최민우와 최민우의 집안을 박살내길 바란다. 심지어 그가 최민우의 매형이고 그 집안의 사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옴므파탈처럼 재벌가의 여인들을 유혹하는 데 탁월한 그는 아내 최미연(유인영)의 해바라기 사랑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에게 사랑은 중요하지 않으며 복수만이 중요하다. 다만 스스로 난리부르스를 추는 팜므파탈이 될 수 없기에 그 역할을 변지숙/서은하에게 떠넘긴다. 드라마 상에서 민석훈은 계속해서 변지숙/서은하를 부추긴다. 가족을 버리라고, 탐욕스러워지라고, 악녀가 되라고. 하지만 악녀의 가면을 쓰는 대신 계속 답답이로 남으려는 변지숙/서은하를 그는 참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어느 순간 팜므파탈처럼 변해가는 건 변지숙/서은하가 아닌 민석훈의 몫이 되어버렸다. 복수의 대상인 처남 최민우 앞에서 우아하고 도도하면서도 흑심을 감춘 표정으로 사과를 깎는 민석훈을 보라. 최고의 팜므파탈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의 절정이다.

안타깝게도 <가면>에서 배우 수애는 이 남자들이 욕망하는 여자가면을 동시에 연기하지만 공허하게 드라마에서 맴돌 따름이다. 그건 이 <가면> 안쪽에 있을 법한 서은하/변지숙 혹은 변지숙/서은하의 매력을 드라마가 전혀 건드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은 있지만 그 가면 안쪽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인물은 희미하다. 안타깝게도 <가면>에서 그녀의 캐릭터가 질주하는 순간은 운전대에 앉아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때가 전부다. 아니면 최근 회차에서처럼 이야기의 LTE급 전개를 위해 갑작스레 그녀에게 모든 일을 척척 처리하는 원더우먼 가면을 씌워줄 때라거나.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