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우화로 한국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손님>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독일 민담을 원작으로 삼아서, 한국의 50년대를 배경으로 찍은 판타지 호러이다. 영화는 손님이라는 뜻이 지닌 중의성을 잘 활용하면서, 현실 사회의 모순을 비유한다. 쥐를 쫓고 죽이는 스펙터클이 장르적 쾌감을 극대화시키며, 공동체의 내부와 외부가 격돌할 때 빚어지는 사회적 공포를 끔찍한 방식으로 환기시킨다.

◆ 서양민담을 한국의 1950년대에 접목시키다

서양 민담을 한국의 시공간에 가져온 것이 독특해 보일 수 있지만, 첫 시도는 아니다. <헨젤과 그레텔>(2007)은 서양 동화를 한국의 1970년대 즈음으로 가져 왔다. 그러나 조악한 스토리텔링과 과도한 미술로 이질감만 부각시키며 실패하였다. 하지만 <늑대소년>(2012)은 서양 전설을 한국의 1970년대로 가져와 크게 성공하였다. <늑대소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익숙한 <가위손>의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면서, 송중기·박보영의 매력으로 서사의 빈틈을 메우며 이질감을 상쇄시켰기 때문이다. <늑대소년>의 흥행은 서양 전설을 한국의 시공간으로 가져와도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 결과 이러한 시도는 차츰 늘고 있다. TV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는 부분적이나마 외계인 이야기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풀어놓았다. 최근 TV드라마 <오렌지 마멀레이드>와 <밤을 걷는 선비>는 뱀파이어라는 서양 전설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그린다. 이처럼 서양민담을 한국의 시공간에 풀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은, 젊은 세대들이 어린 시절부터 그림책이나 TV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서양민담을 접한 까닭에 무의식의 차원에서 거리감이 없어진 덕분이다. 또한 조선시대나 한국의 근현대를 구체적인 시공간으로 보기보다는 사극의 시공간으로 여기기 때문에, 일종의 퓨전사극을 보는 심정으로 이러한 접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손님> 역시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장르 접합물이다. <늑대소년>이 배우의 매력으로 서사의 공극을 메웠듯, <손님>은 기이한 스펙터클을 통해 서사의 빈틈을 채워낸다. 쥐떼를 형상화한 CG는 물론이고, 쥐를 쫓기 위해 피우는 연기로 인한 판타지적인 느낌이나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는 붉은 빛의 하늘 등은 상당한 스펙터클의 효과를 지닌다. 또한 적절한 음악과 음향으로 인해 관객들이 맛보는 시청각적인 만족은 상당하다.



하지만 <손님>이 서양민담을 한국의 1950년대에 기계적으로 착종시키고, 이질적인 틈새를 스펙터클로 메운 안이한 영화는 아니다. <손님>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 작용을 통해, 한국인의 무의식을 근저에서 건드린다. 또한 영화가 판타지적으로 펼쳐내는 결말은 한국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강렬한 우화로 작용한다.

영화의 제목인 ‘손님’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손님은 흔히 외부에서 오는 사람이란 뜻으로 쓰이지만, 옛날에 마마 즉 천연두를 ‘손님’으로 부르기도 했다. 또 이사 다닐 때 따지는 ‘손 있는 날’의 유래가 날짜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니는 귀신을 뜻하는 단어인 ‘손’에서 온 것이다. 즉 우리말에서 손님이란 단어는 외부인, 역병, 귀신 등의 뜻을 지닌다. 왜 하필 손님이라는 말에 이런 꺼림칙한 뜻이 달라붙어 있는지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원래 외부인이라는 것이 반가움의 대상일 수도 있고, 두려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 온 유럽인이나, 조선 말기에 온 서양인들이 그러했듯이, 외부인은 새로운 문물을 전파할 수도 있고, 전염병을 옮길 수도 있고, 전쟁을 몰고 올 수도 있고, 심지어 공동체 자체를 완전히 절멸시킬 수도 있다.

환대할 것인가, 경계할 것인가, 또는 추방할 것인가. 이는 그때그때 내부인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달라진다. <손님>은 손님이란 제목이 지닌 복합적인 의미를 잘 살려내면서, 6.25 직후 산골마을을 지나던 ‘떠돌이 악사’가 폐쇄된 공동체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 마녀에서 마녀사냥으로

피리 부는 악사 우룡(유승룡)과 아들 영남은 약장수를 따라 전국을 떠돌던 사람이다. 양복차림에 충청도 말씨를 쓰는 이들은 한복차림에 경기 말씨를 쓰는 마을 사람들과 뚜렷이 구분된다. 우룡은 한쪽 다리를 절고, 영남은 결핵으로 기침을 한다. 불길한가? 그런데 더욱 불길한 것은 이들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다. 경계와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 그리고 마을 촌장의 태도 역시 꺼림직 하다. 이들은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는가.

마을은 흡사 <이끼>의 폐쇄된 공동체가 그러하듯이, 촌장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음험한 폭력의 기운을 감추고 있다. 또한 촌장은 <빌리지>의 지도자들이 그러했듯이, 외부세계에 대한 공포를 기반으로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고자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 그리고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혈의 누>의 섬마을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끔찍한 집단적 죄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누군가를 내쫓고, 죽이고, 그들로부터 마을을 빼앗은 사람들.

영화는 손님이란 제목이 지닌 이방인, 역병, 귀신이라는 의미로부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 작용을 통해, 의미를 확장시켜 나간다. 역병의 이미지는 결핵과 ‘문둥이’의 이미지로 나아간다. 쥐는 역병을 옮기는 매개체로 강력한 이미지를 지닌다. 귀신의 이미지는 무녀, 마녀로 나아간다. 실제로 영화에는 ‘추방된 문둥이’의 이미지와, ‘마녀를 연상시키는 무녀’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마녀에서 마녀사냥으로 의미를 넓혀간다. 그리곤 한국의 역사에서 벌어졌던 대표적인 마녀사냥의 실재를 보여준다.



마녀사냥은 원래 마녀가 아니지만 마녀재판을 통해 마녀로 만든 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화형 시켜 죽이는 짓이다. 실제로 서구의 역사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에서 벌어진 비슷한 예가 바로 ‘빨갱이 사냥’ 이다. 보도연맹 사건에서 보듯이, 빨갱이가 아닌데 빨갱이로 덧씌워 공개적으로 죽였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고, 뭔가 부당하다고 느끼지만 일단 나부터 그들과 무관함을 증명해기 위해 다 같이 돌팔매를 던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내면에는 집단적인 공포와 죄의식이 형성된다. 이러한 빨갱이 사냥은 한국전쟁 전후에 가장 극심하였지만, 인혁당 사건에서 보듯이 독재정권 시절 내내 계속되어 왔으며,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에서 보듯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는 ‘빨갱이 사냥’을 통해, 이방인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을 ‘간첩’이라는 구체적인 증오의 존재로 확정해나가는 과정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손님>은 이방인에 대한 공포, 마녀사냥, 집단적 죄의식 등의 개념을 한국의 1950년대 ‘빨갱이 사냥’으로 확장한다. 물론 그 방식이 정교하지 않은 탓에, 1950년대라는 시공간을 추상적으로 그렸다거나, 빨갱이라는 개념이 느닷없이 출연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손님>은 <혈의 누>와 같은 추리 사극이 아니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우화와 같은 상징으로 서사를 풀어나가는 판타지 호러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굳이 말하자면 <손님>의 시공간은 <혈의 누>와 <늑대소년>의 중간 지점에 놓인 어떤 세계로 보인다.) 어찌됐든 <손님>의 가치는 단순히 서양 민담을 풀어내기 위해 한국의 1950년대를 뜬금없이 소환한 영화가 아니라는 데 있다. 영화는 개념의 추상적 전이를 통해, 한국의 1950년대라는 시공간에 내적 필연성을 부여하였다.



◆ 살기 위해 지은 죄도 죄다

촌장은 말한다. “전시에 간첩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이 명제를 떠받히는 건 지금도 여전히 전쟁 중이라는 거짓공포이고, 저 자는 간첩이라는 거짓 논증이다. 즉 폐쇄된 공동체에서 그의 명령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전쟁의 공포가 계속되어야 하고, 새로운 지식과 문명을 퍼뜨리는 이질적인 타자에 대한 증오심을 가져야 한다. 혼자 어려운 한자어를 구사하던 촌장은 일제강점기의 엘리트였다. 그의 벽장에는 황군 제복과 ‘니뽄도’가 들어 있다. 그의 권력과 지식과 철학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각자 맡은바 역할을 강조한다. 그리고 “살기 위해 지은 죄는 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뿌리내린 집단적인 죄의식을 봉합하기 위함이다. 그는 추방과 배제를 통해 모두를 죄짓게 하고, 모두를 공포에 질리게 한 뒤, 그 죄의식과 공포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통치한다.

그런데 몹시 낯이 익다. 판타지로 구성된 1950년대 산골마을의 통치 질서가 아니라, 해방 후 7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남한 사회 전체의 통치 질서가 이렇지 않은가.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친일권력의 세습자들이 전쟁의 공포와 남북 긴장관계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거짓 빨갱이사냥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증오와 불신을 부추기고, 새로운 문물의 질서를 배척하며 각자 자리에서 잠자코 일하라고 겁박한다. 그리고 ‘살기 위해 지은 죄’는 죄가 아니라며 약자들의 죄의식에 기대어 자신들의 거악을 사면 받는다.

끊어진 동아줄을 타고 오르다 떨어지는 촌장의 최후는 한국 민담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구질서에 기댄 촌장의 응징으로 걸맞다. 또한 “살기 위해 지은 죄도 죄”라는 명제는 <나의 절친 악당들>에서 강조하는 명제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죄”와 더불어, 현재의 한국 사회를 사는 관객들에게 뚜렷한 시사점을 던진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먹고사니즘’이라는 말로 면죄부를 남발하였던 한국사회가 도덕의 아노미에 빠진 스스로를 건져 내기 위해 사용해야 할 지렛대가 바로 이 명제들이다. 살기 위해 지은 죄도 죄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의 미래는 없다. 아이들은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아소 님하, 세월호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손님>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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