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 그냥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신수원 감독의 <마돈나>를 뒤늦게 보았는데,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좋아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신수원의 영화는 첫 장편 <레인보우>다. 하지만 그 영화가 가장 좋은 신수원 영화라고 말할 생각은 또 들지 않는다. 개인적인 선호도나 호감이 작품의 완성도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마돈나>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좋아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폐소공포증을 자극할 정도로 모노톤이었다는 것이었다. 이 영화의 타이틀롤인 '마돈나' 미나는 한국에서 여성의 육체를 가진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일만 골라서 겪는다. 희망에 대한 보답은 없고 쓸만한 조언자나 조력자도 없으며 주인공에겐 이를 극복할 힘도 없다. 그나마 영화가 끝에 희망이라고 제시한 건 한 여자아이의 탄생인데, 과연 그 아이에게 그게 좋은 소식인지는 확신이 안 간다.

<마돈나>의 이야기 선택이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미나와 같은 사람들은 실제로 끔찍한 위험에 노출된다. 아무리 영화가 이야기를 위해 과장했다고 해도 이 조건에 맞는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나는 신수원이 자신의 창조물을 존중하고 사랑했다고도 믿는다.

하지만 과연 이 영화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아트하우스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하나의 답을 찾을 생각은 없다. 하나의 영화를 본 만 명의 관객들에겐 만 개의 감상이 있다. 일반화는 편리하자고 하는 짓이지 100퍼센트 정답은 아니다.



그럼에도 감히 일반화를 시도한다면, 한국 영화에서 이런 고통의 묘사는 이미 장르화되었다는 것이다. 끔찍한 시스템 속에서 고통 받는 여성을 그리며 이들을 동정하고 이해하고 옹호하려는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것이 극대화되고 또 반복되면서 추리나 SF처럼 고통 받는 여성을 그리는 장르가 되어버리고 이를 '즐기는' 장르 관객들이 태어난다. 70년대에 선정적으로 소비되었던 호스티스물을 생각해보라. 단지 내가 상상하는 관객들은 조금 더 오싹한데, 그들은 미나의 고통을 '예술'로 소비한다. 물론 나는 그들이 미나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 감상'이 불가능할 테니.

<마돈나>를 본 모든 관객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관객들은 어느 정도 이런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아트하우스 영화 자체가 '예술'을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관객들은 일단 '예술'을 보러 온다. 그리고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이 반복되면 관객들은 그 습관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단 익숙해진 '장르'의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그 예술적 인상을 극장에 남겨놓고 그냥 나올 가능성은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것보다 높다.

해결책은 관객들을 꾸준히 다양한 방법으로 자극하는 것이다. 다양한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을 그리며 우리가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다양한 요소를 탐구하는 것이다. 물론 보편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관객들이 무의식적으로 이를 '장르화'하지 않게 꾸준히 그 틀을 깨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려면 바짝 긴장하고 깨어있어야 하는 것은 창작자 자신이다. 그냥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좋은 작품이 온전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환경도 같이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마돈나>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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