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억해’ 서인국, 모처럼 제대로 남자주인공을 얻었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KBS 월화드라마 <너를 기억해>에서 기억은 중요한 화두다. 기억에는 지난 시절의 감미로운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이 상처의 다른 이름이거나, 극복해야 할 내면의 짐인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기억은 나와 타인을 이어주는 새로운 연결고리로 변하기도 한다. 물론 기억은 인간을 괴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끔찍한 기억이 그의 내면을 모조리 망가뜨려서.

10대의 나이에 불행한 사건으로 임신한 부유한 집의 막내딸이 있다. 그 집에서는 막내딸의 출산을 비밀리에 치른다. 아들을 낳은 10대의 미혼모는 세상에 태어난 아이를 보자마자 “저것 좀 치우라”고 말한다. 아이의 엄마는 아들 혹은 자신의 비극을 혐오하다 끝내 자살한다. 태생부터 축복받지 못한 아이는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고 버려진 물건처럼 골방에 갇혀 자란다. 이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인간처럼. 누구도 기억할 수 없는 인간으로. 이후 청년이 된 아이는 감정 없는 연쇄살인마 이준영(디오)이 된다.

“태어날 때부터 괴물이었던 사람이 있고 누군가 괴물로 바라보고 괴물로 불러서 괴물이 된 사람이 있단다.” (이준영)

<너를 기억해>는 형사가 나오고 살인범이 나오는 수사물이다. 하지만 연쇄살인범 이준영의 실체를 찾아내고 단죄하는 수사극이라 요약설명한다면 이 드라마의 매력을 놓칠 위험이 크다.

물론 드라마의 주인공인 이현(서인국)과 차지안(장나라)은 이준영 때문에 과거의 소중한 순간들을 강탈당한 인물들이다. 이현은 프로파일러인 아버지를 이준영 때문에 잃고, 소중한 동생 이민(박보겸)은 이준영에게 납치당한다. 차지안의 아버지는 이준영의 탈옥을 도왔다는 누명을 쓴 채 실종된 교도관이다. 그리고 가족이 사라진 뒤 평범한 아이들과 달리 두 사람의 유년은 일곱 빛깔 무지개가 아닌 잿빛으로 가득해진다.



그런데 이현과 차지안이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며 동시에 현재의 이준영이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은 오묘하다. 짜릿하거나 통쾌한 복수극과는 다소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어딘지 자맥질 같은 면이 있다. 구해주는 사람이 없어 물속에서 버둥거리던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바깥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순간 같은 것. 이현과 차지안은 자신들을 불행하게 한 원흉을 찾아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삶을 스스로 이끄는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해 간다.

이 과정에서 이현과 차지안, 그리고 이준영까지 과거의 기억과 끊임없이 접속한다. 그 과거 기억의 대상은 그들의 부모다. 세 사람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는 드라마 내에서 과거형이다. 그들의 기억에만 존재할 뿐 현재에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그들의 부모는 이들이 살아가는 현재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삶을 옭아매는 셈이다.

‘어떤 삶일까? 죽어버린 사람과 함께하는 삶은.’ (차지안)

<너를 기억해>는 죽어버린 사람과 함께하는 삶에서 현재의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으로 변해가는 두 인물의 치유과정을 그려내기도 한다.



이현은 유년시절 파트너가 되자며 찾아왔던 기억 속의 여자아이 차지안과 현재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간의 감정교류를 통해 진짜 파트너십을 배운다. 지극히 이성적인 천재형 인간 이현은 차지안을 통해 타인을 걱정하고 아끼고 그리워하는 감정을 마음으로 체험한다. 차지안은 파트너인 이현을 통해서 이성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법을 배운다. 그들이 이성과 감정이 조화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한 덕에 과거의 기억이 그들의 삶을 뒤흔드는 현재의 사건으로 되돌아왔을 때 그들은 견딜 수 있다. 이현은 살인마가 된 동생과 재회했을 때도 여전히 그를 사랑으로 감쌀 수 있다. 차지안은 실종된 아버지의 유골을 직접 발견하지만 감정적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한편 이성과 감정이 기괴하게 꼬여버린 괴물 이준영이야말로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인물이다. 그는 언뜻 살아 있는 인간보다 죽은 시신들과 더 편안한 감정 교류를 나누는 사람 같다. 하지만 <너를 기억해>는 법의학자 이준호(최원영)로 변신해서도 살인을 멈추지 않은 이준영을 단순 살인마로 묘사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준영이 괴물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와 이 괴물이 이현이나 차지안과의 만남으로 인간에 가까운 감정들을 알아가는 장면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살인마에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 여기 인간과 사이코패스 그 어딘가에 있는 사람도 있다. 그는 이현과도 닮았고 이준영과도 닮았다. 바로 <너를 기억해>의 정선호(박보겸) 변호사다. 이현의 실종된 동생 이민이면서 이준영의 손에서 자란 정선호인 그는 현재 살인마이자 변호사다. 그리고 괴물과 인간의 어딘가에 있는 연약한 짐승 같은 표정으로 평범하지만 영악한 얼굴로 이 세상을 사는 우리 인간들을 바라본다. 정선호의 표정과 눈빛을 보노라면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정선호를 괴물, 악인이라고 경멸할 수 있을까? 어쩌면 세상의 악인에게 손가락질하는 우리들 또한 보고 싶지 않은 타인들을 무심하게 외면하며 어느새 악인들을 만들고 있던 것은 아닐까?



“넌 널 버린 사람만 있고 널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내가 널 기억할게.” (정선호)

<너를 기억해>는 복잡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하지만 퍼즐을 맞추듯 흥미롭게 쌓아간다. 조각난 에피소드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큰 그림으로 만들어진다. 더구나 무거운 이야기들을 깔고 가면서도 너무 감정적으로 흐르거나 자극적인 장면을 선뜻 끼워 넣지 않는다. <너를 기억해>는 전체적으로 드라이한 분위기로 흐르며 순간순간 냉소적인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인 이현 특유의 성격이나 태도는 드라마 <너를 기억해>와 고스란히 닮아 있다. 이현은 감정 없는 인간으로 보였던 탓에 프로파일러인 아버지에게 사이코패스로 오해받지만 실은 동생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 내면을 지녔다. 이현은 오래 기억될 만한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이다. 드라마 <너를 기억해>를 기억할 만한 이유 또한 비슷하다. 감정을 남발하지 않는 세련되고 단단한 플롯의 이야기도 흔치 않지만 그 내면에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까지 담담하게 담아낸 경우는 더더욱 흔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어수선한 마지막 회가 아닌 15회까지만 기억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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