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타인의 짓밟힌 자존심을 세워줄 수 있다면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베테랑>은 류승완 감독의 형사물이다. <짝패>에서 꽃피웠던 호쾌한 길거리 액션과 <부당거래>에서 보여주었던 사회비판의식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영화이다. 슬랩스틱이 살아 있는 액션과 떠들썩한 유머는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를 보는 듯한 쾌감을 방출하며, 현실에서 재료를 얻은 사회 비판은 <공공의 적>을 보는 듯 한 공분과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영화는 배우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는데, 언제나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던 황정민은 우직하고 저돌적인 다혈질 형사로 자신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생애 최초로 악역에 도전한 유아인도 기대이상의 호연을 펼쳐보였다. 그는 도무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우지 못한 채, 유아적인 충동만 가득한 악인의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보여준다. 그 외에 모델로 첫 연기에 도전한 장윤주나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진경의 매력도 충분히 돋보인다.

<베테랑>은 우직한 형사 서도철(황정민)을 내세워 ‘인간말종’인 재벌 2세가 벌이는 파렴치한 범죄를 수사해가는 형사물이다. 영화가 그저 웃기고 통쾌한 액션극인 것만은 아니다. 각 인물이 등장할 때, 앞으로 전개될 사건에 대한 복선을 촘촘하게 까는데, 이는 영화 전체를 매우 짜임새 있게 보이도록 한다.

가령 서도철(황정민)이 중고차 범죄자 아지트에서 변호사 운운하는 범인 앞에서 자해를 해보이고는 “이제부터는 정당방위”라고 외치는 것은 앞으로 서도철의 활극이 어떻게 전개될지 맛을 보인다. 풀리지 않던 수사는 경찰이 칼침을 맞음으로써 판이 뒤집히고,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대결장면에서도 서도철은 먼저 맞음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고 조태오를 붙잡는다. 재벌 2세 조태오(유아인)는 첫 등장부터 경호원들에게 팔씨름을 시키고, 한 사람의 목에 담배 빵을 놓고는 “장난”이라고 일축한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대결시키고 구경하거나 우월적 위치에서 조롱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자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서도철은 조태오의 킁킁거림을 보고 “약쟁이”임을 직감한다. 조태오는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하는 서자로, 소유와 과시의 충동을 제어할 수 없으며, 자신이 타인에게 함부로 대해도 아무도 자신을 제제하지 못하는 것에 쾌감과 냉소를 느낀다. 그는 술집에서 보란 듯이 여자들에게 위악적인 폭력을 행한다. 그리고 그러한 패악에 담담한 서도철에게 ‘베테랑’이라 추어주며 자신의 힘과 도량을 과시한다.



◆ 한국의 재벌은 어떤 조직인가

영화는 조태오를 중심으로 재벌이 어떤 조직인지 보여준다. 첫째, 재벌은 회장의 검찰 조사가 보여주듯이 불법이 만성화 된 조직이며, 검찰총장 출신의 법률 고문과 법무팀을 통해 온갖 불법적인 일을 합법적으로 막는다. 둘째, 적자, 서자, 조카, 등이 소유권을 나눠 먹는 족벌체제로, 회장을 중심으로 한 혈연적 위계질서에 의해 철저하게 권력이 재편되어 있다. 서자인 조태오는 서열에서 밀릴까봐 노심초사이며, 조카는 희생양이 된다. 셋째, 조태오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일반직원들의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지하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지고, 회장이 주제하는 회의에 들어가는 임원들은 기저귀를 차고 들어갈 정도로 권위적인 조직문화가 팽배해 있다. 넷째, 회장은 집무실에서 임원에게 골프채로 빳다를 치고, 조태오는 걸핏하면 집기를 때려 부수거나 사냥개로 직원을 위협하는 등 폭력이 만연하다.

영화는 조태오가 본사 앞에서 하청업체로부터 떼인 임금 420만원을 지불하라며 1인 시위를 벌이던 배기사를 자기 사무실로 끌고 가 어떤 모욕을 퍼부으며 돈의 힘을 과시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장면은 직접적으로 어떤 사건을 환기시킨다. 지난 2010년 SK그룹 창업주의 조카인 최철원이 자기 사무실에서 탱크로리 화물노동자를 야구방망이로 구타하였던 이른바 ‘맷값 폭행’ 사건을 연상시킨다. 당시 최철원은 집무실에서 야구방망이와 골프채로 자기 직원들에게도 폭행을 가했고 사냥개로 위협을 가했다는 탐사보도로 인해 세간에 충격을 주었다.

또 2007년에는 한화의 김승현 회장의 아들이 유흥업소에서 사소한 시비로 상처를 입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김승현 회장이 직접 자신의 경호원과 조폭을 데리고 가 술집종업원들을 산으로 끌고 다니면서 권투 펀치를 재연해가며 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실제사건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재벌의 조직문화가 조직폭력배의 문화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이러한 사실에 착안하여, 인간성을 상실한 채 인간에게 패륜적인 폭력을 가하는 재벌들의 비틀린 행태를 비판한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그치지 않고, 조태오가 자신의 죄과를 덮기 위해 관계자들을 돈으로 입막음하고, 인맥을 동원하여 경찰과 검찰에 외압을 행사하고, 광고로 언론을 통제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겉으로는 사람 좋은 모습으로 위로금을 운운하고 상대에게 무례하다고 나무란다. 인맥과 돈과 자리로 얽혀 있는 세계에서 재벌은 사회를 손에 넣고 주무르며, 자신들의 경호 인력을 통해 공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서도철이 본사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비즈니스 클럽에 들어가려고 할 때, 마지막에 파티장에 들어가려고 할 때, 경찰을 막아서는 경호 인력들은 흡사 사극에 등장하는 사병을 방불케 한다. 영화는 서도철이 아니었던들 진실이 완전히 묻힐 뻔한 사건이었음을 충분히 납득시킨다. 그런데 정말 이처럼 철옹성 같은 재벌을 상대로 일개 경찰이 무슨 용기와 배짱으로 맞설 수 있단 말인가.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쪽팔리게 살지 말자”와 “아버지의 가오”를 제시한다.



◆ 떳떳한 아버지의 이름으로

서도철은 화물연대 소속의 배기사의 투신사건을 접하고 홀로 탐문을 벌인다. 그의 행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배기사가 사고 전날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조태오와 술을 마시면서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다. 둘째는 그날 술자리에서 본 조태오의 모습과 신진물산이라는 기업의 조직문화에서 범죄의 냄새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큰 이유가 있다. 기사의 아들이 아버지가 맞았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도철을 가장 크게 분노하게 만든 것은 이 지점이다.

영화는 초반의 서도철과 배기사의 짧은 만남을 통해 영화전체가 품고 있는 정서를 보여준다. 서도철은 배기사의 아들에게 만원을 건네고, “남자는 판단이 빨라야지”라 말한다. 이 장면은 앞서 서도철이 자신의 아들에게 “때려서 깽 값 물어주는 건 상관없다. 맞고 다니지만 마라. 남자는...”라고 말하던 장면과 겹친다. 이는 서도철이 병원에서 배기사의 아들을 따로 만나 “남자는 이런 일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내야...”하는 장면에서도 계속된다. 즉 서도철은 ‘아들을 남자로 키우고 싶어 하는 아버지’로서 배기사는 물론 세상 모든 ‘아들의 아버지들’과 그러한 정서를 공유하려는 사람이다. 서도철의 행위에는 ‘아버지의 이름으로’가 결부되어 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서도철이 재벌과 맞서려고 할 때, 반장(오달수)은 “너도 애 학교 마칠 때 까지는...”이라는 현실논리를 들어 만류한다. 반장은 연예인을 꿈꾸는 아들을 돕고 싶다. 또한 총경(천호진)도 딸의 연주회가 걸려 있고, 검찰간부에게도 아들의 취직자리가 걸려있다. 돈다발을 싸들고 온 최상무(유해진)는 서도철의 부인(진경)에게 아들의 교육비 지원을 약속한다. 최상무가 회장에게 회유당할 때도 자식들의 영국유학이 빠지지 않는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모들이 불의에 굴복하는 이유는 자식들 때문이다. 그러니 온갖 부정과 비리가 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한편 그처럼 교육에 돈을 쏟아 부으면서도 부자간의 윤리가 바르지 못했을 때 빚어진 결과가 바로 조태오이다. 그의 방에는 하버드 졸업장이 놓여있다. 그는 아버지의 인정을 갈구하고 아버지를 두려워하지만, 아버지의 폭력을 그대로 따라 한다. 이것은 상류층의 끔찍한 실패이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의 실패도 존재한다. 바로 가난한 아버지가 당하는 멸시와 비겁을 목도하며 노예로 자라는 것이다.

영화 <베테랑>에서 가장 참기 힘들게 찍힌 장면이 바로 배기사가 폭행을 당할 때, 조태오가 배기사 아들의 얼굴을 틀어쥐고 “똑 바로 보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조태오는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게 돈 버는지를 알아야 아들이 나중에 효도를 하지.”라 말한다. 즉 아들에게 계급적 굴욕의 상흔을 깊이 새겨 순종하는 노예가 되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그깟 420만원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에요.”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깟 420만원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구타를 당해도 어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아들이 깊이 인식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나 존엄은 망실한 채 기꺼이 돈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라는 뜻이다. 이것은 부자관계를 철저하게 깔아뭉개는 인격살인이며, 가정파괴적인 행위이다. 아들이 받았을 정신적 충격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되지 않는다. 아들의 머리에 조태오가 심으려 했던 노예의 가치관을 씻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며, 그들의 잘못은 분명하게 처벌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에서 서도철이 나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배기사 아들이 입은 상흔을 치유해주기 위하여 ‘세상 모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서는 것이다. 돈이나 연줄로 자식의 교육을 밀어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쪽팔리지 않게 사는” 아버지로서, 즉 자식 앞에 떳떳한 도덕과 존엄을 지닌 아버지로서 아들들에게 바른 삶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아버지였지만 가난한 노동자는 ‘그깟 돈 때문에’ 아들 앞에서 최소한의 존엄도 지키지 못한다. 천박한 계급사회가 노동자의 인격을 짓밟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기사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항의하러 갔다가 억울한 사고를 당한다.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또 다른 아버지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밝힌다. 이처럼 ‘아버지의 이름으로’ 올바른 가치가 정립된다는 개념은 감독의 전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부당거래>는 무수한 이해관계와 권력이 엉키는 가운데, 철저한 현실논리에 의해 돌아가는 세계를 보여주었고, <주먹이 운다>는 아버지의 이름이 고작 마초주의적인 신파로 귀결되었다.



실제로 검찰도 아닌 경찰이 재벌을 수사하는 일은 극히 드물며, 외압에 의해 성사되기 어렵다. 그러나 영화는 조태오가 자기 죄를 덮기 위해 계속 무리수를 둠으로써, 경찰이 조직의 자존심을 걸고 수사에 나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판타지이다. 외압으로 인해 수사를 막던 총경이 막내 경찰이 칼침을 맞았다는 소식에 무조건 수사를 지시하는 것은 순진한 묘사이다. <부당거래>를 통해 노회한 검경의 조직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던 감독이 뭘 몰라서 이처럼 순진한 묘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적당히 부패한 관료라 할지라도 자기 조직에 대한 자존심이나 자기 조직원에 대한 책임감은 최소한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냐는 항변에 가깝다. <주먹이 운다>는 ‘맞으며 돈을 버는’ 아버지를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지닌 사회적 맥락은 소거한 채 자기연민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베테랑>은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버는 어버지는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맷값을 쥐어주며 사람을 패는 것은 패륜적인 일이며, 불의에 타협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임을 분명히 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그렇다. 돈이 없어도 ‘가오’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 돈이 없다고 ‘가오’가 짓밟혔을 때는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짓밟힌 ‘가오’를 세워주어야 한다. 그리 하면 돈이 없어도 ‘가오’를 지키며 살 수 있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베테랑>스틸컷]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