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통쾌함이 부족했던 몇 가지 이유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통쾌함’이다. 이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았을 때 가장 기대했던 것도 바로 그 ‘통쾌함’이었다. 정말로 통쾌한 영화를 보고 싶었다. 조금은 비현실적이더라도 극장을 나설 때만이라도 기분이 좋을 수 있는.

결국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통쾌함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다들 통쾌하다고들 하니 나 같은 사람은 소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느끼지 않은 것을 느꼈다고 할 수는 없는 일. 이번 칼럼의 주제는 ‘왜 내가 <베테랑>을 보면서 전혀 통쾌함을 느끼지 못했는가’가 되겠다. 주제, 사실성, 완성도 같은 건 빼고 철저하게 ‘통쾌함’만 다룬다.

우선 비율의 문제가 있다. 이런 종류의 ‘정의실현물’의 경우 대부분 V자형을 취한다. 악당들이 나쁜 일들을 저질러 착한 사람들의 고생이 심해진다. 그러다가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거나 착한 사람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스스로 주먹 쥐고 일어나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이 V자의 뾰족한 부분이다. 이 정의실현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면 재미가 없으니까 꼭짓점을 지난 뒤에도 선은 여전히 들쑥날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점이 어디에 있으냐는 중요하다.

통쾌함을 원한다면 이 지점이 앞으로 갈수록 좋다. 물론 너무 앞으로 가면 악당이 하찮게 보일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적어도 40퍼센트 길이는 되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과정의 쾌락이 중요하므로 상승하는 부분이 될 수 있는 한 길고 그 묘사도 상세해야 한다.

그런데 <베테랑>에서 이 역전은 언제쯤 나오나? 한 시간 반은 기다려야 하나? 하긴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이건 그리 이상한 비율이 아니긴 하다. 한국 관객들이나 시청자들이 주인공의 역습보다 개고생을 더 좋아하고 분노의 해소보다 분노 자체를 더 좋아한다는 의심은 이전부터 품어왔다. <베테랑>의 비율은 그런 관객들을 고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런 관객이 아니다.



다음. 이런 이야기가 통쾌하려면 주인공이 악당보다 확실하게 우위에 서야 한다. 힘이 더 세거나 능력이 더 출중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수록 좋다. 중요한 건 주인공이 꼭짓점 이후의 모험을 통해 악당을 확실하게 밟았다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운이 들어가도 좋겠지만) 그 밟는 과정은 결국 주인공의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베테랑>의 광역수사대 형사 서도철(황정민)에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나? 그는 나름대로 정의감에 불타는 남자다. 그건 알겠다. 하지만 그는 영화 내내 분노하고 고함치지만 정작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막판에 그는 간신히 사악한 재벌3세 조태오(유아인)를 법정에 세우는 데에 성공하지만 여기서 그의 능력이 한 일은 별로 없다. 따지고 보면 여기서 최고의 공헌을 세운 사람은 조태오 자신이다. 이 영화의 조태오는 거의 자폭을 갈망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를 체포하려고 하는 형사들에게 온갖 증거들을 알아서 다 대준다. 그런데도 꼭짓점은 한 시간 반이 지나야 나오고 그 뒤에도 미적지근한 것이다.



그를 법정에 세웠다고 해서 정의가 실현된 게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자. 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 이 나라의 사법시스템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거라 믿는다. 허구의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계와 늘 같으라는 법은 없다. <배트맨>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부모를 잃은 백만장자가 가면을 쓴 자경단원이 되어 미치광이 악당들을 때려잡는 세계를 별 의심 없이 믿는다. 하지만 <베테랑>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같은 곳이 아니라면 이야기 자체가 먹히지 않는다. 그리고 두 세계가 같은 곳이라면 조태오는 감방 안에서 특별대접을 받으며 얼렁뚱땅 몇 년을 보내다가 광복적 특사로 나왔을 거다. 통쾌한가?

어떤 사람들은 막장 재벌N세의 맨얼굴이 그대로 노출된 것에 의미를 두고 싶어할 것이다. 영화 클라이맥스도 거기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래서 뭐? 인터넷을 할 수 있는 눈과 손을 가진 사람이라면 실명과 엮인 더 심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일부는 이 영화에 나오는 에피소드의 모델이 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우리가 이 나라 갑들의 맨얼굴을 몰라서 이러고 있나? 조태오가 서도철을 두들겨 패는 장면을 찍어대는 수많은 구경꾼들 중 형사를 도우려 뛰어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중간에 나오는 아트박스 아저씨도 불평만 잠시 하다가 물러난다. 그리고 이들이 찍은 동영상은 잠시 인터넷을 달구다가 사라지고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통쾌한가?



다음. 조태오는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진 인물이지만 통쾌함을 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많이들 모르는 사실인데, 악당이 망하는 것을 보고 쾌락을 느끼려면 관객들은 악당에게도 감정이입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의 고통과 공포를 느끼면서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조태오에겐 그게 불가능하다. 그는 짜증과 분노 이외엔 의미 있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를 아무리 두들겨 패도 만족스러운 고통은 주지 못한다. 그를 묶어놓고 지금까지 그에게 당해온 모든 사람들을 모아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허가해주었다고 상상해보자. 그 ‘무슨 짓’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내내 실실 쪼개거나 징징거리기만 할 것이고 오히려 그 ‘무슨 짓'’을 하는 다른 사람들이 짜증이 날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 사법시스템 안에서 그는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통쾌한가?



다음. 난 정의로운 주인공 서도철에게도 별 감정이입을 못하겠다. 정의실현을 위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뛰어들어 무언가를 이루었으니 그는 분명 우리 대부분 사람들보다 낫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나는 한국 영화 속 평균적인 형사들에게 감정이입이 쉽지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그들이 터트리는 불법적이고 부당한 작은 폭력들이 코미디로 소비되는 것이 불편하다. ‘나는 이런 애들은 때려도 돼’의 논리가 스케일이 커지면 무엇이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폭력과 큰 폭력이 다른 것은 아니다. 이들은 연속된 곡선을 그리며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내가 던진 질문들은 “<베테랑>이 사실성을 유지하면서 장르물로 소비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닿는다. 많은 사람들이 장르물을 경멸하지만 장르물이란 의외로 고도화된 문명이 따라주지 않으면 스스로 존재하기 어렵다. 과학자에 대한 존중과 올바른 대우가 없다면 설득력 있는 SF가 나오기 어렵다. 사법제도가 어느 정도 공평하게 작동되고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추리물은 존재하기 어렵다. 스파이들이 꼭 도덕적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유능할 거라는 확신이 있지 않는 한 첩보물은 나올 수 없다. 우연히 만난 남자가 자신을 한 명의 사람으로 존중해 줄 거라는 확신이 없는 세계에서 이성애 로맨스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나는 <베테랑>이 사실성과 장르적 재미를 모두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래도 결과가 이 정도로 머문다면 형사물이 아닌 다른 장르를 택해야했던 게 아닐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베테랑>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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