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녀’, 의협심이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압도적인 예고편으로 관심을 폭발시켰던 무협영화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의 흥행이 부진하다. 공들인 장소 캐스팅이나 화려한 색감, 그리고 유려한 무술동작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독창적인 한국무협을 기대한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무협의 마니아들이라면 <와호장룡><영웅><일대종사> 등의 장면들이 자동으로 연상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으니까. 더욱이 무술의 합이나 카메라 워킹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 등 캐스팅은 드림팀 수준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이 제 몫을 다했다고 보긴 힘들다.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돕는 묘사가 부족한 탓에, 전도연의 모든 대사는 뜬 구름 잡는 것처럼 붕 더 있다. 김고은 역시 심리적인 혼돈이 잘 표현되었다고 보긴 힘들다. 무술액션과 폭발적인 감정연기를 다 소화하기에는 힘에 벅찬 느낌이다. 하지만 이것은 배우의 탓이 아니라 시나리오의 빈틈과 감독의 허술한 디렉팅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 와중에도 이병헌의 탄탄한 무술연기와 복잡한 내면연기는 비상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하지만 흥행부진의 요인 중 이병헌의 사생활에 대한 반감이나 이로 인한 개봉시기 조율이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되기에, 결과적으로 그의 캐스팅이 좋았다고 보기도 힘들다.

이러한 이유에 의해 <협녀>가 관객들의 외면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중에 오해도 존재한다. 혹자는 영화가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등 기존의 무협영화의 클리셰를 반복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영화의 후반부를 보지 않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한 게 아니라면 납득하기 힘든 비판이다. <협녀>는 반전을 통해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무협영화의 공식을 뒤집는다.

이것은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는 반전이다. 하지만 많은 관객들이 바로 그 지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왜 자식이 친부모를 죽여야 하며, 심지어 그것이 친어머니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복수자가 가짜이므로 정당성이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 글은 <협녀>가 급진적으로 내세운 ‘부모를 죽이는 자식’이라는 모티브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하려는 목적을 지닌다.



◆ 그는 왜 자식을 복수자로 키웠을까

고려 무인시대. 설랑(전도연)에 의해 검객으로 길러진 홍이(김고은)는 검술을 뽐내기 위해 무술대회장에 나갔다가, 유백(이병헌)으로부터 스승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 유백을 만났다는 홍이의 말을 들은 설랑은 묻는다. “너는 왜 무술을 배운다고 했지” “부모님을 죽인 원수를 죽이기 위해서 입니다.” 설랑은 “나와 유백이 바로 그 원수다”라고 고백한다.

홍이는 풍천의 딸이다. 수년전 풍천과 설랑과 유백은 백성들과 함께 민란을 일으켰지만, 권력에 눈이 먼 유백의 배신에 의해 민란은 진압된다. 유백의 배신에 설랑은 놀랐지만, 유백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 때문에 함께 풍천을 죽였다. 그러나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동지와 백성을 저버렸다는 죄의식에 시달린다. 설랑은 유백의 배신에 동조하였으며, 여전히 유백에 대한 애증을 끊어내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그는 풍천의 딸 홍이에게 검술을 가르쳐, 후일 자신과 유백이 그의 칼에 응징되기를 원한다. 그것이 가장 올바른 속죄의 과정이자,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랑의 이러한 생각에 관객들이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영화는 설량의 생각을 선언하듯 처리해버릴 뿐, 사유의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배경이 역사적인 구체성을 지니지 않으며, 인물 역시 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히려 이들은 대단히 모호하고 상징적이며, 신화적인 원형을 지닌다. 따라서 설랑의 말과 행동도 상징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설랑은 자신에게 배신자를 응징하는 심판자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백과 함께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정당성을 지닌 새로운 주체를 세워서, 그로 하여금 자신을 포함한 이전세대의 죄를 심판하고, 비틀린 역사를 바로세우는 역할을 수행하기 바란다.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이자 스승이 원수라는 것을 안 홍이는 혼란에 빠진다. 그는 집을 떠나 유백을 죽이는데 진력한다. 그런데 홍이를 제압한 유백은 그가 가짜라고 말한다. 맞다. 영화는 반전을 통해 그가 홍이가 아님을 알려준다. 설랑이 역사의 심판자로 세우고자 했던 풍천의 딸, 홍이는 죽었다. 그러자 설랑은 자신과 유백 사이에 태어난 친딸 설이를 홍이로 키운다. 설랑은 왜 자신의 딸에게 상처와 고통을 안기며 홍이로 키웠을까. 유백과 자신이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으로 생각하는 설랑은 그 심판의 주체가 풍천의 딸 홍이가 아니라 자신과 유백의 친딸 설이여도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심판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 듯하다. 왜냐하면 그 심판은 부모의 원수를 갚는 사사로운 복수가 아니라 역사의 죄인을 심판하는 공적인 차원을 지니기 때문이다.



◆ 그는 왜 친부모를 죽였을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홍이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자신에게 세상과 무술을 가르쳐준 설랑이 원수임을 알았을 때도 혼란스러웠지만, 자신이 설랑과 유백의 딸임을 알고 더 큰 혼란에 빠진다. 양어머니인줄 알았더니 원수였고, 원수인줄 알았더니 친어머니였다니! 그런데 내가 풍천의 딸 홍이가 아니라면, 설랑과 유백을 죽여야 할 사명도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옳을까. 설랑과 유백과 설이가 칼을 들고 만난 자리에서, 설이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가족상봉의 감회를 느끼며, 가족로망스를 완성해야 할까.

여기서 그의 결단을 돕는 설랑의 가르침이 울려 퍼진다. “협은 사사로운 것을 끊어내는 것이다” “옳은 것은 모두에게 옳은 것이다” 설랑의 가르침은 ‘보편적인 정의’를 일컫는다. 흔히 협(俠)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폐쇄적인 의리나 정리(情理) 따위로 이해하는 것이다. 가령 의협심(義俠心)이란 단어는 곧잘 깡패들의 패거리 의식을 지칭할 때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설랑은 사사로움을 끊어내고, 모두에게 옳은 것을 실천하라 가르친다. 이는 사사로운 연정에 이끌려 대의를 그르친 자신에 대한 통렬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믿는 일관된 신념에 의해 자신과 유백이 친딸이 내려치는 심판의 칼을 맞는 것이 정의에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김고은이 주인공이었던 여성느와르 <차이나타운>의 ‘엄마’(김혜수)가 딸로 키운 일영(김고은)의 칼에 기꺼이 죽고자 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엄마’는 “쓸모가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일관된 자기 신념에 의해 자신을 제거의 대상으로 내어준다. ‘엄마’의 철학이 ‘쓸모’와 ‘생존’을 키워드로 삼는다면, 설랑의 철학은 ‘공공선’과 ‘심판’을 키워드로 삼는다는 점이 다르다.

설랑의 딸 설이는 고뇌를 통해 외친다. “나는 풍천의 딸 홍이다.” 그리고 설랑과 유백을 한 칼로 처단한다. 친부모를 죽이는 건 간단치 않은 일이다. 그것은 영화 <암살>의 여성영웅 안옥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이 죽여야 하는 친일자본가 강인국이 친아버지임을 알았을 때 안옥윤은 잠시 고민한다. 그의 고민을 줄여주기 위해 영화는 강인국이 사사롭게는 어머니와 언니를 죽였으며, 먼저 안옥윤에게 “나는 모르는 년”이라며 총을 쏘아버린 비정한 아버지라는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옥윤은 마지막 순간 직접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하지만 설이는 마지막 순간 자신을 “풍천의 딸 홍이”로 명명하며, 유백은 물론 모녀의 정이 없을 수 없는 설랑까지 한 칼에 죽인다. 그의 결단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설랑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을 사사로운 혈연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라, 역사청산의 대의와 사명을 부여받은 공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친부모라 할지라도 역사적 심판의 대상으로 삼는 결연함을 매우 급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생물학적 딸이자, 정치적 유산을 상속받은 존재이다. 유신독재 청산에 대한 박근혜의 대답은 “내 아버지를 부정하라는 것이냐”였다. <오이디푸스>부터 <스타워즈>까지 아버지를 죽이는 주체는 주로 아들이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영화 <차이나타운><암살><협녀> 등에서 유난히 ‘부모를 죽이는 여성영웅(리더)’이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아버지를 승계할 뿐 청산하지 못하는 박근혜 시대의 실현되지 못한 열망을 역상으로 비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볼일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협녀: 칼의 기억>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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