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덴마크 여성감독 수잔 비에르의 작품세계가 주목받는 이유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영화가이드] 밀물처럼 가슴을 치고 들어 온 영화는 마치 썰물로 물이 빠져 나가듯,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바다로 밀어 내 줘야 한다. 혼자만 간직하고 있으면 안된다. 그건 감정적 이기의 발로이며 궁극적으로는 죄악이다. 수잔 비에르의 영화 <인 어 베터 월드>는 혼자만 끙끙 앓고, 혼자만 눈물 흘리며, 혼자만 환호해서는 안될 영화다. 감동을 나눠야 할 영화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얘기다.

<인 어 베터 월드>는 폭력의 이중주를 그린 영화다. 스웨덴 출신으로 덴마크에 헤어진 아내와 아이를 두고 살아가는 의사 안톤(미카엘 퍼스브랜듯)은 북부 아프리카의 난민촌에서 진료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수단의 다르푸르로 의심되는 이곳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야만적인 폭력이 행사되는 지역인데, 이른바 민병대라 불리는 반군들이 태아 성별을 가지고 내기를 하면서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만행을 저지른다.

안톤은 잔혹한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향해 묵묵히 치료행위를 이어가지만 어느 날 뜻하지 않게 곤혹스런 선택의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바로 민병대 대장이라는 작자가 다리를 크게 다쳐 진료소를 들어 온 것이다. 이 악마 같은 인간에 대한 치료를 거부함으로써 보다 많은 양민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의사로서의 본분을 살려, 어떻든 간에 진료에 나서야 하는 것인가. 안톤은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안톤을 둘러싼 폭력적 환경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덴마크에서 살아가는 10살 난 아들 엘리아스(마르쿠스 리가드)도 처지가 비슷하기는 마찬가지다. 엘리아스는 늘 또래 아이들로부터 이지메를 당하며 힘든 학교생활을 이어 간다. 그러던 어느 날 크리스티안(윌리엄 요크 닐센)이라는 아이가 런던에서 전학을 오게 되면서 분위기는 급반전된다. 크리스티안은 여느 때처럼 아이들에게 당하고 있던 엘리아스를 일격에 구해내게 되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생존 감각을 내세우는 크리스티안을 좇아 엘리아스는 점점 더 실제적 폭력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두 꼬마는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치기에까지 이른다.

그리 많은 편수는 아니지만 수잔 비에르가 지금까지의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좇아가고 있는 문제는 폭력이 얼마나 사람을 되돌릴 수 없는 지경으로 이르게 하느냐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 온 남편이 점점 더 광기에 빠져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괴롭히게 된다는 내용의 2004년작 <브라더스>가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수잔 비에르의 문제의식은 단지 그 선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중요한 귀착점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렇게 사람을 안과 밖 모두에서 바꾸게 하는 폭력이란 존재 앞에서 우리 인간들은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느냐는 것이며 바로 그점이야말로 이 폭력적 세계를 구원하고, 용서하며, 재생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2007년에 발표한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 버린 것들>은 뜻하지 않은 폭력에 희생된 사람과 그 뒤에 남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따뜻하기 그지 없는, 무엇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남편(데이빗 듀코브니)이 거리에서 뜻하지 않는 사건에 휘말려 총을 맞고 즉사하는 바람에 아내(할 베리)는 인생이 주저 앉은 느낌이다. 그런 그녀는 남편의 친구(베네치오 델 토로)를 증오의 대상이자 복수의 상대로 삼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이 친구의 집을 갔다 오는 길에 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잘 나가는 부동산 건축업자, 친구는 퇴락할 대로 퇴락한 마약중독자다. 남편은 어릴 때 죽마고우라며 이미 인생이 끝장나 있는 친구를 위해 조촐한 생일잔치를 해주고 오는 길이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아내는 친구를 앞에 두고 그 어떤 폭력보다도 잔혹한 느낌으로 이렇게 얘기한다. “왜 당신이 죽지 않았어? 죽어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이야. 왜, 당신이 내 남편대신 죽지 않았어?” 아내의 오열 앞에 친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침묵으로 답을 대신한 그는, 그때부터 마치 속죄를 구하는 양 그토록 끊기 어려웠던 마약을 멀리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의 노력을 지켜 보면서 아내는 서서히 남편의 친구를 자신의 마음 속에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세상의 폭력이든, 개인의 폭력이든 우리가 폭력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우애와 사랑, 용서와 구원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제목처럼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바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수잔 비에르는 얘기한다.

폭력 앞에 선 우리는 더 폭력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폭력적이면 안되는 것인가. 우리가 한번 비폭력의 삶의 방식을 택한다고 한들 계속해서 그 같은 태도를 지킬 수 있는가. 그게 그리 쉽고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수잔 비에르의 생각이며 또 그렇게 쉬운 얘기가 아닌 한, 더더욱 그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의 그녀가 작품을 통해 늘상 강조하려는 점이다.

<브라더스>에서 <우리가 불속에서 잃어 버린 것들> 그리고 이번 신작 <인 어 베터 월드>에 이르기까지, 수잔 비에르의 목소리는 단지 그녀가 유럽 저 멀리 국가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지 못했다. 그런데 그건 매우 불공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 어 베터 월드>의 덴마크 원제는 <복수>다.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느덧 자신의 마음 속에 복수의 칼이 자라나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진정한 복수는 복수를 하지 않는 것, 폭력을 오히려 저 멀리 지척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폭력이 끊임없이 폭력을 부르는 세상이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그래서 점점 더 세상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간다.

그 혼돈의 한 가운데에서 수잔 비에르는 조용히 휘파람을 분다. 모두들 마음을 좀 가라 앉히라고. 대신 함께 손을 맞잡고 가슴을 서로의 가슴에 포갠 채 따뜻한 사랑을 나누라고. 세상은 종종, 수잔 비에르의 밀어처럼 고독한 광야에서의 조용한 외침이 뒤흔들게 하는 법이다. 수잔 비에르와 그녀의 영화 <인 어 베터 월드>야말로 바로 그런 영화다.

우리에게 정녕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인가. 결국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거기에 도달하려는 진심의 희망이다. <인 어 베터 월드>는 이 어지러운 세상을 향해 진심을 담아 희망의 목소리를 전하려는 영화다.


칼럼니스트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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