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들은 영화 ‘에베레스트’를 더 높게 평가하겠지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올해 휴고상 장편부분을 수상한 류츠신의 <삼체>는 지금 장정초 주연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휴고상 장편부분 수상작 중 영화화가 된 작품이 몇 편인지 아는가? 궁금해서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봤다. 다음은 그 결과다. 누락된 작품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하지만 큰 실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스타쉽 트루퍼스>, 로버트 A. 하인라인, <듄>, 프랭크 허버트, <엔더의 게임>, 오슨 스콧 카드, <해리 포터와 불의 잔> J.K. 롤링

<삼체>까지 포함하면 다섯 편이다. 물론 후보에 오른 작품 중에 각색된 작품들도 있고, 휴고를 받지 않았다고 나쁜 작품인 것도 아니며, 영화 이외의 다양한 각색물도 있다(예를 들어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내>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1953년부터 SF 문학의 역사를 정리해왔다고 자부하는 행사에서 고르고 고른 작품들이 영화화되는 경우가 이렇게 적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심지어 <듄>과 <엔더의 게임>은 각색 결과가 그렇게 좋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해 이 리스트엔 SF영화의 걸작 같은 건 들어있지 않다.

그건 장르에 대한 선입견이 실제 장르와 그리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관객들에게 SF는 구경거리가 많은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장르이다. 하지만 실제 SF 걸작은 영화화하기에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관객들을 끌 액션이나 스펙터클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훌륭한 영화의 소스가 훌륭한 소설이라는 법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런 건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크리스티의 장편소설을 영화화하는 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의외로 영화화가 어려운 소재로 산을 뽑고 싶다. 또는 각색하기 어려운 장르로 산악문학을 뽑는다고 해도 된다. 비슷한 말이다.

얼핏 보면 산은 근사한 영화 소재 같다. 드라마, 액션, 위기일발, 정복. 모두 영화와 어울리는 단어들이다. 여기에 끝내주는 배경과 고소공포증이 추가되면 3D 아이맥스로 만들어져야 할 핑계가 된다. 1996년에 일어난 에베레스트 대참사를 다룬 발타사르 코르마우퀴르의 <에베레스트>가 3D 아이맥스로 영화화된 것도 이런 기대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나쁜 영화는 아니다. 산을 좋아하고 이런 종류의 경험이 있는 관객들에겐 더 좋은 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스타들이 잔뜩 나오는 3D 아이맥스에서 기대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이 포맷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에베레스트는 화면 속에서 충분히 거대하다. 이 사건을 다룬 논픽션인(영화의 원작은 아니다)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책으로 익숙한 사건들이 어떤 장소와 상황에서 벌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쉽게 잊을 수 없는 악몽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리는 드라마의 대부분은 의외로 가시적이지 못하다. 에베레스트는 오르는 걸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는 산이 아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드라마는 산을 오르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추위와 산소부족 속에서 얼어죽는 것이다.

이러니 3D 아이맥스와 스타 캐스트의 역할은 미미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눈가루를 뒤집어 쓴 배우들이 눈쌓인 산 어딘가에서 (이런 장면들은 대부분 알프스에서 찍었다고 한다) 쪼그리고 앉아 얼어죽는 것이다. 고글과 눈가루 때문에 알프스까지 올라가 개고생을 한 배우들의 연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들어가는 재료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실베스터 스탤론이 나오는 산악액션영화와는 달리 사실적이다. 하지만 예술은 단순히 사실적인 표면만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그 경험이 진짜로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산악인들은 이 영화를 더 좋은 영화로 볼 거라고 했는데, 그건 그들이 ‘영화가 보여주는 표면’만을 보고도 극중 인물들이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 해독할 수 있는 코드북, 그러니까 실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기준을 그들에게 맞추어야 할까?



다시 존 크라카우어의 책으로 돌아가보자. <희박한 공기 속으로>의 독서가 <에베레스트>의 감상보다 상대적으로 더 인상적인 것은, 이 책이 영화가 쉽게 담아내지 못하는 내면의 드라마와 고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지만 <에베레스트>를 보고 산소부족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온전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직접 경험을 제외한다면 그 경험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도구는 카메라가 아니라 언어다.

<에베레스트>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소박한 다큐멘터리 영화 <터칭 더 보이드>가 훨씬 더 뛰어난 산악영화인 이유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도구가 카메라가 아닌 언어, 그러니까 실제 사고에서 살아남은 등반가들의 내레이션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언제나 그랬다. 훌륭한 산악영화보다 훌륭한 산악문학이 언제나 더 많은 이유는 등산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내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에베레스트>는 나쁜 영화가 아니다. 단지 장르와 소재에 대한 선입견에 의존했다가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낭비한 영화이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소재와 장르의 선입견에 눌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한 수많은 재료들 중 의외로 현실화되기 좋은 것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입견의 표면 밑에 우리가 아직 건드리지도 못한 수많은 이야기의 광맥이 존대한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에베레스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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