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어느 문자보다 다양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이유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28자로써 전환(轉換)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 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한글 해설서 <훈민정음> 서문에서 예조판서 정인지가 한 말이다.

한글의 우수성은 정인지가 말한 것처럼 온갖 소리를 글자로 옮길 수 있다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는 몇 년 전 EBS가 여러 나라 학생들을 대상으로 모르는 소리를 들려준 다음 받아 적게 한 실험에서 확인됐다. 예를 들어 중국이나 일본 학생들은 같은 소리를 듣고 제각각 적은 반면 한국 학생들은 비슷하게 기록했다.

이런 차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이해하려면 언어와 문자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언어에서 문자가 나오지만 문자로 인해 언어가 제약된다. 일본인의 발음이 단순해서 히라가나가 나왔고 히라가나는 일본인의 발음을 고착되게 한다.

중국어와 한자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한자 몇 만 글자가 있지만 음절로 구분하면 410개에 불과하다. 한자를 익히면서 중국인이 구사하는 음절은 410개로 제한된다.

우리말에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음절이 1,500가지에 이른다. 우리말은 온갖 소리를 담아내는 훌륭한 그릇인 것이다. 또 이런 우리말을 온전하게 담아낸 그릇이 한글이다. 그래서 한글이 어느 문자보다 다양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말 음절이 일본어보다 풍부하지만 중국어와 비슷한 정도라면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몇 백 가지 음절에 해당하는 가장 간단한 한자를 가져와서 쓰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표기하는 한자를 중국어와 구별하는 방법은 따로 약속하면 된다. 일본처럼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로 나눌 수도 있겠고.



음절이 풍부한 것은 언어로는 훌륭한 특질이어도 문자를 만들기엔 불리한 변수였지만 세종은 이를 독창적으로 해결했다. 수많은 음절을 개별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표현한다는 게 세종의 전무후무한 아이디어였다. 자음 또한 하나하나 만드는 대신 기본 글자꼴을 변형해 비슷한 소리를 추가해 만들었다. 여기엔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라는 중국 음운학의 연구 결과를 활용했다.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모음까지 조합해 만드는 방식을 적용해 만들었다.

한글 모음에도 반영된 세종의 독창성은 우리말을 구사해온 언중의 모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됐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 언중은 ‘아’와 ‘어’를 반대 음가로 이해했다. ‘오’와 ‘우’도 그렇게 한 조합으로 파악했다. ‘알록달록’ ‘얼룩덜룩’ ‘오물오물’ ‘우물우물’ 등 많은 단어를 그 사례이자 근거로 들 수 있다.

‘아’와 ‘어’가 한 조합이고 ‘우’가 ‘오’의 반대 음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모음의 글꼴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훈민정음의 모음이 조합형이면서도 직관적이고 간결해진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영어 알파벳을 보라. 자음은 말할 것도 없고 모음에서도 이런 직관성을 찾아볼 수 없다.

훈민정음은 소리가 풍부한 우리말과 모음에 대한 언중의 통찰력이라는 바탕에 세종이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인류 지적 유산의 걸작이다. 이 ‘바탕’이 별로 거론되지 않은 듯하여 한글날 즈음에 몇 글자 적는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위원> smitten@naver.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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