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 2색 오페라의 세계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지난 15일부터 18일까지 국립오페라단의 ‘진주조개잡이’, 성남아트센터의 ‘라 트라비아타’, 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 선보인 독일 비스바덴국립극장의 ‘로엔그린’이 오페라 관객을 유혹했다.

특히 ‘진주조개잡이’는 김학민 제 11대 국립오페라단 단장 부임 후 첫 오페라로 관심이 집중됐고, ‘라 트라비아타’는 정은숙 성남예술센터 예술감독 부임 후 첫 제작오페라로 기대감을 높였다. 게다가 정은숙 단장은 제 7대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으로 활약한 바 있다.

국내에서 전막 오페라 형태로 무대에 오르는 것이 처음인 ‘진주조개잡이’는 심플한 무대 연출로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면,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상연되는 작품으로 꼽히는 ‘라트라비아타’는 현대적인 재해석을 반영해 곱씹어보는 재미를 안겼다.

두 작품 모두 무대 저 뒤편에서 아련하게 들리는 테너의 음성이 더해져 천천히 귀를 사로잡는 매혹적인 오페라이기도 하다.

■ 칼바람 속 가슴을 어루만지는 듯 서정적인 음악이 일품 ‘진주조개잡이’

1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오른 비제의 오페라 ‘진주조개잡이’는 고대 실론섬(지금의 스리랑카)을 배경으로 무녀 레일라와 진주조개를 잡는 두 어부 나디르와 주르가의 삼각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드라마 상으로 치밀한 긴박감이 넘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사랑과 우정의 갈등, 종교적 금기와 신비주의가 비제의 음악 속에 녹아있다.

특히 나디르가 부르는 귀에 익은 그대 음성, 나디르와 주르가가 함께 부르는 아름다운 이중창 ‘신성한 사원에서’, 레일라가 부르는 ‘어둠 속에 나 홀로 남았네’ 등 시적인 정취가 가득한 이국적인 선율로 가득하다.



모나코 몬테카를로 극장장으로 재직 중인 중견 연출가 장-루이 그린다와 에릭 슈발리에의 손을 거친 이번 무대는 부드러운 조명, 회전하는 무대장치, 간결한 의상으로 최대한 음악에 집중하게 했다. 옅은 안개에 잠긴 시적 이미지 콘셉트, 조명(로랑 캐스탕)을 이용한 회화적 스푸마토 기법으로 무대에 신비로움과 몽환적 터치를 더했다. 물론 이는 집중력이 길지 않은 오페라 관객들의 호불호를 불러일으켰다.

이번 오페라가 무대가 주가 아닌 성악가들의 음악이 주가 된다는 점에서 이를 반기는 음악인들도 많았다. 비제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음악은 칼바람 속 가슴을 어루만지는 듯 서정적이고 섬세했다.

이번 ‘진주조개잡이’는 테너 헤수스 레온·김건우(나디르), 소프라노 나탈리 만프리노·홍주영(레일라), 바리톤 공병우·제상철(주르가), 베이스 박준혁·김철준(누라바드), 연주 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 합창 국립합창단이 함께했다.

주인공 ‘나디르’ 역의 멕시코 테너 헤수스 레온은 환상적인 메사 디 보체(일정한 음을 길게 뻗으면서 서서히 크레셴도하다가 데크레셴도하여 끝나는 것)를 선보여 ‘역할에 제격이다’는 평을 이끌어냈다. 테너 헤수스 레온과 바리톤 공병우, 두 사람이 부르는 이중창은 너무도 투명하고 아름다워 이 괜찮은 오페라를 오롯이 만끽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나디르’ 역 테너 김건우는 첫 주연을 맡아 보다 로맨틱함이 가득한 청년으로 분해, ‘위험을 무릅쓴 사랑이라는 절실함’이라는 공감대를 관객과 함께 형성했다.

특히, 2막 나디르의 아리아와 레일라(소프라노 홍주영)와의 2중창으로 이어지는 ‘잠들어 있는 꽃, 내 사랑하는 여인이여’에서 듣는 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유연하고 풍부한 음색을 선보였다. 다만 주요 아리아에서 긴장한 기색이 그대로 노출된 점, 또한 어린 나이를 감추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색한 수염과 긴 머리가 작품에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주르가 역 바리톤 공병우, 누라바드 역 베이스 박준혁은 역할과 혼연일체 된 모습으로 극에 활력을 불어 준 일등공신이었다. 웅장한 음색에 실려온 노래와 캐릭터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액팅들이 극적 효과를 더했다.

김학민 선장이 올바른 길을 안내 할 국립오페라단은 2015-2016 시즌 레퍼토리 개막작 조르주 비제의 ‘진주조개잡이’에 이어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라트라비아타’ ‘루살카’ ‘오르페오’ 등으로 시즌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연출부터 의상, 무대, 조명, 그리고 성악진 일부까지 모두 외국인들이 맡고 있는 국립오페라단 제작 작품들에 대한 변화의 목소리가 높다. 새로운 단장을 맞이해, 추후 어떤 변화를 보여줄지 기대해본다.



■ 알을 깨고 나온 동백꽃 ‘라트라비아타’

상류사회를 주름잡던 ‘고급 창녀’ 비올레타와 세상물정 모르는 귀족 청년 알프레도의 사랑의 행로는 순탄치 못하다. 이제 이별할 시간. 뒤늦은 후회에 알프레드는 오열하고 관객들은 숨을 죽이지만 비올레타는 다독인다. 마음의 소리에 귀 닫게 하는 사회적 통념에 대해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오페라의 막은 내린다.

베르디 오페라 ‘라트라비아타’가 알을 깨고 나왔다. 이번 라트라비아타는 사교계의 여왕이 아닌,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 따돌림을 받는 프랑스 파리 환락가 최고 매춘부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려냈다. 화류계 여성들의 굴레와 이를 이용한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가 신랄하게 표현된다.

이번 포스터 콘셉트 역시 ‘알을 깨고 나온 동백꽃’이다. 알렉상드르 뒤마 2세의 소설 '동백꽃 아가씨(La Dame aux Camelias)'가 원작인 오페라로 동백꽃은 여주인공 비올레타를 상징한다.

빨간색 미니원피스를 입은 소프라노 이리나 룽구와 빨간색 롱드레스를 입은 소프라노 오미선이 주인공 비올레타로 분해 유려함과 서정성 넘치는 가창을 들려줬다. 특히 소프라노 오미선은 억압적인 사회에서 비올레타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외로움과 갈등들을 소리와 드라마안에 함께 녹여내, ‘라트라비아타’가 과거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현재의 살아있는 이야기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고 한다. 이야기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현대의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열쇠는 익숙한 이야기를 얼마나 새로운 방식으로 요리해 내느냐에 달렸다.

이번 공연은 기름기를 뺀 듯 무척 간결하고 현대적인 분위기로 연출됐다. 장영아 연출이 그려낸 이 작품은 세상에 현존하는 갖가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신비하고 숭고한 사랑의 기쁨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고통의 감정, 상류층의 뒤틀려진 도덕관에 대한 경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부조리란 메시지를 무겁지 않게 객석에 전달한다.

크루즈선에서 이루어지는 상류층의 이중생활을 보여주는 2막 2장의 무대가 인상적이었다. 플로라가 초대한 파티에서는 거대한 흑마 탈을 남근 부위에 걸친 이들의 가식적인 웃음이 함께하는 난잡한 쇼가 벌어진다.

가터벨트를 입은 여성의 하체 모형 형상을 한 미끄럼틀을 신나게 내려오는가 하면, 여타 카드 도박으로 그려지던 장면이 아닌 인간룰렛게임이 시작된다. 상류층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연출로 볼 수 있다. 비올레타를 걱정하는 친구로 그려지던 그랑빌 의사가 이런 사교 파티에서는 여성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상당히 이중적으로 그려졌다.

오윤균 디자이너의 손을 거친 무대는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쓰인다.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진 만듦새는 깔끔하고 세련됐다. 파리의 살롱이 아닌 현대적인 고급스런 유람선을 기본으로 1막의 경사가 가파른 크루즈선 선실을 한 바퀴 뒤집으면 2막의 비올레타와 알프레도가 기거하는 교외의 집이 된다. 3막은 선실의 부수 장치들을 가림막으로 가린 채 여전히 가파른 사막 끝에 매달려 있는 비올레타의 집을 불러냈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뾰족한 칼날이 되어 그녀를 압박해온다.



빈 국립오페라 전속 가수 출신으로 영국 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 데뷔를 앞둔 테너 정호윤과 이태리 베로나 등 유럽의 30여 주요 오페라하우스에서 주역가수로 활동하는 테너 박성규는 알프레도의 카바티나와 카발레타로 시작하고 있는 2막을 유려하게 소화하며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특히 경사 무대에서 펼쳐져 가수로서 노래하기 결코 쉽지 않았을 이번 작품에서 열정적인 사랑의 환희와 배신당한 고통을 생생하게 표현한 주역들의 열연이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

바리톤의 명 아리아 ‘프로방스의 바다와 대지’를 깊이있게 소화한 바리톤 유동직과 박정민은 강인하고도 치밀한 계획자, 아들을 어떻게든 집으로 돌려보내고픈 부성 가득한 아버지의 모습을 오가며 드라마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이외 메조소프라노 김민지, 소프라노 김형애, 베이스 함석헌, 이준석, 테너 김병오, 바리톤 문영우, 박용명이 출연했다.

헬싱키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피에르 조르조 모란디가 지휘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는 정제되면서도 주요 극적인 장면의 호흡을 잘 살려내며 무대 위 성악가와 함께 작품 속으로 안내했다.

한편, 4일 공연 내내 객석이 꽉꽉 들어찬 성남아트센터는 이번 오페라의 성공에 힘입어 2016년 8월 경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선보일 계획이다. 성시연 경기필하모닉 상임지휘자가 오페라 무대에 첫 데뷔를 하고, 바그너 전문 성악가 연광철이 주요 출연진을 맡을 예정이다.

공연전문 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국립오페라단, 성남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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