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오해로도 해당 자산이 부실해지면서 상황 악화 회오리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서평] 서로 얽힌 금융회사들 중 한 회사가 부실해지고 예금인출 사태(런)가 발행하면 시스템 전반에 의심이 짙게 드리운다. 의심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 금융회사는 부실해질 수 있다.

경제학자 게리 고튼은 문제 자산으로부터의 런이 누군가의 햄버거에서 대장균이 검출된 상황에서의 히스테리처럼 이해할 만하다고 비유했다. 특정한 공장에서 가공한 쇠고기에 대한 검사 소홀로 균이 생겨 검출됐는데 개별소비자들은 자신이 구매하려는 햄버거나 스테이크에 박테리아가 없는지 판단할 방법이 없다. 소비자들은 안전하다고 광고되던 쇠고기가 그렇지 못하다고 판정된 사실만을 알며, 따라서 안전하다고 외치는 광고를 불신하고 모든 쇠고기를 불신하는 반응을 보인다.

박테리아 히스테리의 금융 버전은 더욱 악성이 된다. 일단 소비자들이 특정 금융상품으로부터 런을 시작하면 그 상품은 오염 수준을 불문하고 가치가 하락하고 이에 따라 소비자에게 더욱 위험하게 돼서 히스테리를 누적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쇠고기를 회피하는 심리만으로도 실제 박테리아가 햄버거 간에 전염된다”는 초현실적인 상황에 비견된다.

◆ 두려움 확산 속도 제어하려면 = 금융위기는 이처럼 ‘전염’된다. 한 군데의 부실이 다른 다수의 부실 의혹을 낳는다. 은행의 ‘믿어달라’는 호소는 오히려 불신을 스스로 인정하는 부작용을 빚는다. “은행가가 자행의 신용도를 입증해야 할 경우라면, 그 어떤 논리의 내용을 불문하고 신뢰가 사라졌음을 본인도 알고 있다”고 일찍이 영국의 언론인 겸 금융인 월터 배젓은 설파한 바 있다. 부실 의혹은 자산 가치를 깎아내린다. 의구심의 대상이 된 금융회사는 런을 감당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예금인출에 직면한 은행들은 런을 할 필요가 없다고 예금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창문가에 현금을 쌓아놓곤 했다. 금융위기가 금융시스템 전반을 위협할 때엔 이 역할을 개별 금융회사에 맡겨둘 수 없다. 중앙은행이 최후의 대부자로 나서야 한다. 최후의 대부자가 할 역할과 관련해 배젓은 1873년 낸 책 <롬바르드 스트리트>에서 금융회사가 런에 처했을 때는 “창가에 충분한 자금을 내놓고 자유롭고 과감하게 대출을 해 중앙은행이 대출을 계속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대중에게 주라”고 권고했다.

공포와 싸울 때는 공포가 확산되고 심화되는 속도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공포를 앞질러 길목을 막으면야 최선이지만 그건 현실에서는 실현하기 매우 어려운 속도다. 적어도 두려움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두려워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기보다는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두려움”인 것이다.

시장의 공포를 물리치기 위해 금융회사에 중앙은행은 유동성을 공급하고 정부는 자본을 확충하거나 부실자산을 매입해주는 역할을 한다. 미국 재무부는 2008년 금융위기 때 부실자산 구제 프로그램(TARP)을 입법해 금융회사에 자본을 채워줬다. 헨리 폴슨 재무부 장관은 관련 법안에 금융회사 자본 투입, 관할 당국의 금융회사 인수, 중앙은행에 회계장부 조사와 자문 역할 부여 등 내용을 담았다. 이는 무제한의 권한을 요구한 것이라고 당시 뉴욕연방준비은행장 티모시 가이트너는 설명했다.

의회는 이 법안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폴슨 장관은 “정부에 전례 없는 무제한의 권한을 줘야 그 권한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진다”며 ‘권총과 바주카포’의 비유를 들었다. “권총을 주머니 속에 갖고 있으면 꺼내야 쓸 수 있지만, 바주카포를 들었다면 사람들이 미리 알아주므로 꺼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폴슨의 말과 달리 재무부는 결국 바주카포를 꺼내서 써야 했지만, 당시 공포의 수위를 고려할 때 이런 적극적인 대응 자세는 적절한 것이었다. 만약 바주카포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대포를 써야만 하는 지경으로 상황이 악화됐을 공산이 컸다.

◆ 부작용 우려돼도 ‘적극대응’이 낫다 = 폴슨의 후임으로 재무부를 맡은 가이트너는 공포와의 싸움에서는 너무 적게 행해서보다 너무 많이 행해서 하는 실수가 더 낫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부가 더 많은 것을 하겠다고 약속할수록 실제는 더 적은 일을 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가이트너는 “자연스러운 순리는 개입 전에 가능한 한 오래 기다렸다가 점진적으로 강화하고, 납세자의 손실을 줄이고, 지원에 엄격한 조건을 달며, 위기 원인 제공자를 징벌하며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런 대응은 시스템의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처방”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그렇게 하면 비용이 더 들게 되고 더욱 우려스럽게도 금융 시스템 전체를 망칠 위험이 커진다고 본다.

가이트너는 198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의 대응이 실패한 이유를 그런 대응에서 찾는다. 그는 “일본 정부의 대응 중 대표적인 것이 은행의 자본 공백을 간과하고 기다리다보면 경제가 충분히 회복돼서 가치를 회복하며 은행이 부실을 벗어날 것”이라고 분석한다.

앞서 금융위기를 박테리아 전염에 비유했다. 가이트너의 조언은 감염병을 사회적인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 차단하는 데에도 유효하다. 이는 한국 방역당국이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면서 우리가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금융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신뢰가 깨진 자리엔 자신의 돈을 찾지 못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확산된다. 금융위기를 넘어서려면 두려움의 전염을 차단하면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상식적인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은행 중 약골들에게만 자본을 확충해줄 경우 시장이 이들 은행을 회피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가이트너는 영국에서 그런 부작용이 발생했다며 건전한 은행도 강제로 증자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부채를 줄여 채무자 짐을 덜어주고 채권자가 고통을 분담하도록 하는 ‘헤어컷’에도 그는 반대했다. 헤어컷을 단행하면 자신의 돈을 회수하려는 채권자들의 런을 촉발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판단과 조치는 그가 재무부에서 국제통화기금(IMF)과 함께 1990년대 중반 이후 멕시코와 태국, 한국 등 신흥국의 외환위기에 대처하면서 얻은 지혜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는 자본이 얼마나 멋대로 버블을 키우는지, 신용에 흠이 가면 버블이 어떻게 패닉으로 반전하는지, 위기 관리자들이 어떤 결단과 재원으로 패닉을 잠재우는 데 기여하는지, 그리고 위기 대응에 필요한 조치가 얼마나 인기가 없고 위험으로 점철돼 있는지를 새삼 다시 깨우쳤다”고 말했다.

◆ 도덕∙원칙보다 불길 잡는 게 우선 = 시장의 공포에 대응하면서 그가 얻은 수칙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이는 미증유의 금융위기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이에 따른 언론 및 정치권의 비판과 맞물린 대목이다.

첫째 대형 금융회사 지원을 놓고 대마불사라고들 비판했다. 대마불사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살릴 수 있는데도 대마를 죽이면 안 된다. 충격이 너무 커지기 때문이다. 대마를 다 살린 것도 아니다. 리먼 브러더스는 수단이 갖춰지지 않았고 재무건전성이 떨어져 파산시켰다.

둘째 부실 금융회사 지원은 방화범에 대한 지원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이 있다. 여기에는 도덕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이 있다. 도덕적인 측면을 가이트너는 ‘구약성경적 견해’라고 불렀다. 경제적 측면은 도덕적 해이다. 도덕적 해이를 빚을 수 있다는 우려는 소방서가 불을 끔으로써 다음 화재를 유발한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이에 대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답변했다. “이웃집이 불타는데 침대에서 흡연의 위험을 강조하겠다고 소방차 출동을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 가이트너도 같은 의견이다.

동네가 다 잿더미가 되기 전에 불을 꺼야 한다. 소방서가 불을 꺼준다고 해서 자신의 집을 이전보다 화재 위험에 더 노출시키는 주인은 없다. 소방당국은 화재를 진압한 뒤 관련된 규율을 촘촘하게 만들고 꼼꼼하게 점검해야 한다.

제목 ‘스트레스 테스트’는 실현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평가하는 것을 뜻한다. 그 목적은 안전하다는 필증을 발급해주는 것보다는 정보를 투명하게 드러내 불확실성을 제거하면서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 시장에서 보강이 이뤄지도록 한다는 데 있다.

티모시 가이트너가 주도한 미국의 스트레스 테스트는 1930년대 대공황과 같은 혹독한 조건에서 금융회사의 손실이 얼마나 발생하며 이에 따른 자본 확충 필요액은 얼마인지 시뮬레이션했다. 스트레스 테스트를 두고도 비판이 일었다. 부실한 금융회사에까지 건강하다는 합격증을 찍어주려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금융권에 발생할 추가 손실액이 극복할 수 있는 규모로 분석됐고 은행들은 추가 소요 자본을 TARP 도움 없이도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 유럽의 스트레스 테스트는 실패해 웃음거리가 됐다.

◆ 거침없는 가이트너 캐릭터 = 등장 인물과 회사가 많고 얽힌 이야기도 많은 이 책은 분량이 646쪽이나 된다. 그래서 이 책에서 공포를 물리치고 신뢰를 회복한다는 측면만 간단하게 뽑아냈는데도 어느덧 글이 이렇게 불어났다. 이제 이 책에 담긴 다양한 측면을 일부만 한 문장씩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과거 미국 금융감독시스템의 난맥상과 이후 개선된 사항을 알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번진 주택 버블의 원인과 전개 과정이 상세하다. 뉴욕연방준비은행은 집값 하락은 예상했지만 그 파장을 내다보고 대비하는 데엔 실패했다. 저금리는 주택 버블의 필요조건이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리더로서 권한을 위임한 뒤 신뢰하며 추진해야 할 정책보다 정략을 앞세우지 않았다. 이밖에 래리 서머스, 헨리 폴슨, 앨런 그린스펀, 폴 볼커, 워런 버핏, 버니 샌더스, 장-클로드 트리셰, 볼프강 쇼이블레 등의 일화가 다양하다. 가이트너가 골드만삭스 출신이고 그래서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밑도 끝도 없는 얘기가 주요 언론에서 계속해서 다뤄졌다. 미국 양당정치의 무조건 반대 양태와 의원들의 지역구 챙기기, 한국과 다르지 않은 물어뜯기 청문회 풍경이 생생하다. 외부에 우군이 없는 상태에서 단호하게 위기를 타개해나간 가이트너를 통해 공직자의 길을 생각하게 된다. 언론과 정치권에 대한 가이트너의 거침없고 신랄하며 유머러스한 독설도 꼭 맛보기를 권한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위원> smitten@naver.com

[사진=인빅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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