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여성의 관점에서 본 ‘응답하라 1988’의 진가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세상사는 재미 하나를 놓치고 산다며 안타까워한다. 워낙 술이 안 받는 체질이다 보니 술을 통해 얻어지는 재미야 굳이 궁금치 않으나 요즘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다 보면 내가 모르는 재미 하나가 또 있었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이 점은 생각할수록 아쉬운데 바로 남자 친구와의 우정이다. 십 수 년을 내리 여자 학교만 다녔기 때문인지 아니면 동네에 또래 남자아이가 없었던 건지 나에겐 우정을 나눈 남자 친구가 있어 본 적이 없다.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 봐도 덕선(혜리)이에겐 넷씩이나 있는 남자 친구가 나에겐 왜 평생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건지. 혹시 우리 나이 대에는, 즉 19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축들은 다 그랬던 걸까? 남편에게, 친구들에게 물었다. 결론은 그런 이도 있고 아닌 이도 있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성 간의 우정을 소재로 한참을 이야기꽃을 피웠다. 모임에서, 혹은 전화로, 문자 메시지로 ‘있었으면 어땠을까?’와 지난날의 추억을 늘어놓으며.

누누이 말해왔지만 좋은 영화나 드라마는 관객 수나 시청률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 얼마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느냐, 얼마나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느냐에 있다고 본다. 그런 맥락에서 <응답하라 1988>은 썩 마음에 드는 드라마다. 우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데다가 무엇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지 않나. 선우 엄마(김선영) 에피소드가 방송되던 날에는 특히나 그랬다. 친정에서 걸려온 전화를 퉁명스레 받던 신혼 시절이 떠올라 울컥했고 애써 눌러 참다가 끝내 비죽비죽 눈물을 쏟고 말았던 또 다른 한 순간이 생각나 결국엔 훌쩍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연로하신 친정어머니의 전화를 살짝 부담스러워하게 된 지금의 나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졌다.



한때는 무슨 일만 생기면 득달같이 달려와 해결을 해주셨으나 이젠 어떠한 방패막이도 되어주지 못하는 엄마. 우리 엄마도 아마 내가 보라(류혜영)처럼 경찰에게 끌려갈 지경에 처했다면 별의 별 소리를 다하며 죽어라 막아섰을 게다. 그리고 나라면 보라와 마찬가지로 엄마의 통사정을 남부끄러워했을 테고.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의 나는 밝고 낙천적인 덕선(혜리)이보다는 칼칼한 성정의 보라 쪽에 가까웠던 것 같다. 악다구니를 해댄 적은 없어도 부모님께 고분고분한 딸내미는 아니었고 덕선이처럼 동네 어른들과 살갑게 지내지도 못했으니까.

어쩌면 누군가는 선우 엄마가 보라에게 그러듯이 나라면 혀를 찼을지도 모르겠는데, 또 그러고 보니 내겐 매일매일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던 시절도 있었다.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내 자식, 내 식구만 챙기는 어른이 되고 말았지만. 이렇게 생각은 장면에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자꾸만 늘어만 간다.

살림살이 얘기는 또 어떤가. 우리가 정환(류준열)이네 같은 삼단 냉장고를 몇 년도까지 썼더라? 짤순이가 달린 세탁기는 언제까지 썼었지? 다이얼식 전화기는? 딸아이 있는 집이면 죄다 하나씩 있었던 양배추 인형. 그거 안고 있는 정봉(안재홍)이가 하도 귀여워서 피식 웃다가 우리 집 양배추 인형은 언제 어디로 사라진 걸까 생각해보게 되고. 단서가 있을까 싶어 앨범을 뒤져보고 식구들에게 묻게 된다. 기다, 아니다, 옳다, 그르다, 매사 의견이 분분하다.



짐작컨대 집집마다 소소하니 이런 대화가 오가지 싶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이렇다 저렇다 의견이 갈리고 있지 싶다. 그건 아마 앞서 언급한 우정을 나눈 이성 친구 여부처럼 각자 처한 환경이나 취향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뿐일 게다. <응답> 시리즈 제작진의 고증과 디테일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실 기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떻겠나.

내가 익히 아는 것들에 대한 공감과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동경. 그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얘깃거리가 되는 드라마. 악역에게 개연성을 부여해 공감을 자아내려는 막장 드라마들의 억지가 없어서 좋은 드라마. 그리고 무엇보다 여느 드라마들에 넘쳐나는 재벌가 따위가 등장하지 않아서 좋지 않은가. <응답하라 1988>, 이 드라마가 앞으로 또 어떤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내놓을지, 그래서 나로 하여금 다시금 어떤 추억에 빠져들게 할지 기대가 된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59@daum.net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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