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 이 불편한 드라마를 끝까지 견뎌낸 사람들에게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지난주 종영한 JTBC 드라마 <송곳>은 오늘날 우리 시대와 상당히 동떨어진 드라마다. 배경이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이끌던 참여정부 시절이기 때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송곳>은 사람들이 별로 보고 듣고 싶지 않는 이야기를 가장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할리우드는 수많은 히어로를 보유한 미국 만화책 회사들이 점령했다. 그 이후 할리우드 세계관은 한편으로 더욱 단순해지고 또 한 편으론 복잡해졌다. 명확하던 선과 악의 구도가 모호해졌고, 주인공(히어로)은 무조건 선한 캐릭터가 아니라 보다 입체적으로 변했다. 그런데 히어로는 히어로다. 어쨌든 어려운 법규나 어렵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자들의 동의, 해결을 위한 지난한 합의 과정은 필요 없다. 단 한방의 무력으로 해결한다. 히어로 개인(혹은 어벤져스 같은 단체)의 독단적인 활약으로 악을 제압하고 더 나은 사회를 구현하거나 지켜낸다.

그런데 <송곳>은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힐 듯 답답하다. 한방에 쉽게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이야기를 한다. 그런 데다 목숨이 오가는 서스펜스도, 설레는 로맨스도 아예 없다. 마트 종업원을 다루는 배경 자체부터 <미생>에 몰입하게 했던 판타지 또한 걷어내고 시작한다. 그런 대신 더욱 현실을 체감할 수 있게 몰아붙인다. 정의와 상식이 세상에 구현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혹시나 공감하지 못할까봐 젊은 시절 인생의 부조리와 대한민국 사회의 생리를 엑기스로 맛볼 수 있는 군대를 예를 들어 보여준다.

<송곳> 속 세상은 영원히 남의 일이 됐으면 싶은 무겁고 부담스러운 광경이다. 삐뚤어진 사회를 대변하는 사측의 횡포도 갑갑한데, 단결해서 정의구현,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상식으로 나아가는 길이 너무나 험난하다. 각자 입장이란 저울에 올라서면서 당연해보였던 눈금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거다. 이른바 현실 무게가 적용됐다. 정규직, 비정규직부터 시작해 저마다의 입장과 사정을 갖다보니 거악으로 상정한 사측과 그들의 하수인들과 맞서 싸우기 위한 전열을 정비하는 과정이 쳐다보기 싫을 만큼 지난하게 이어진다.



더욱 갑갑한 것은 전선이 우리에게 익숙한 구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선한 약자를 대신해 악한 강자와 싸우는 게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운다”는 대사는 그동안 봐왔던 많은 스토리들과 전제부터 다르다. 그래서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을 보고 위안도 받고 희망도 갖고 몰입하고 싶은데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별 볼일 없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계속되니 불편하다. 이쯤 되면 고깃집에서 탄산음료를 찾듯 ‘한방의 해결’이란 갈증이 난다. 그러나 상황을 대신 타계해줄 히어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인 이수인 과장(지현우)은 드라마를 더욱 답답하게 만든다. 육사 출신이지만 일당백의 전투력을 갖춘 히어로가 아니다. 융통성이 없고 공감능력이 떨어져 주변에 사람도 없다. 다만, 특별한 공명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현실에 눈을 감지 못한다. 지켜야 할 건 지키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변은 늘 피곤해지고 이수인이 법무사 고구신(안내상)을 바라보듯 주로 불행해 보이는 삶을 살게 된다. 원작자인 최규석은 이런 사람들을 ‘송곳’이라 칭했다.

송곳이 뚫고 나온 우리 사회의 현실을 아무런 판타지 없이 마주하는 것도 벅찬데, 시시한 악인 정 부장(김희원)이 사회라는 장기판의 말로 역시 시시한 말로를 맞이하니 또 한 번 송곳에 찔린 듯 불편해진다. 여기에 노동 운동을 하다가 고문을 받고 평생 지병을 앓는 구고신과 당시 국가권력이란 이름으로 그를 고문했었던 건물 경비원 사이의 관계, 선진 노동자가 되어 더욱더 강력한 강철대오로 신자유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이른바 목적을 가진 운동가 ‘꾼’들이 투입된 파업판의 상황은 상식이 무엇인지 말하기 어렵게 만든다. 선악, 우리 편, 더 나은 세상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것인지 뭐가 좋다는 것인지 드라마는 거기까지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함께 잘 살아보려는 노력으로 시작한 싸움은 당연한 것을 돌려받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레미제라블> 같은 결과는 없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현실은 송곳이 될수록 컴퓨터 없는 사무실로 발령 난 이수인 과장의 처지와 같다. 그래도 원작보다 발랄했던 만큼 최대한 밝고 따스한 기운을 전하며 마무리한다. 안부 메일을 통해 괜찮은 곳에 가면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뚫고 나오는 새로운 송곳들을 보여준다. 그 또한 희망이다. 곳곳에 숨어 있다 나타나는 송곳들의 존재는 조금씩 나아질 것이란 기대를 품게 한다.

<송곳>은 불편하고 답답하고 갑갑한 만큼 시청률이 낮았다. 그런 한편에서 매니악하지만 좋은 반응과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런 시청자들의 반응과 평가는 의미가 있다. 갑갑한 현실을 넘어선 더 나은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이 답답한 드라마를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GDP 3만 달러 시대를 열지 못한 요인으로 노조 활동을 당당히 꼽고, 농민, 노동자, 시민이 함께한 시위대를 IS와 비견하는 세상에 파업을 다루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심히 시의적절지 못한 드라마가 방영된 것 또한 어쩌면 일종의 송곳인 셈이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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