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인간과 시신에 대한 예의를 일깨우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히말라야>는 2005년에 엄홍길 대장이 후배 산악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꾸렸던 ‘휴먼 원정대’의 실화를 그린다. ‘휴먼 원정대’의 이야기는 당시 TV다큐멘터리 <아 히말라야>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휴먼 원정대’는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다. 해발 8천 미터가 넘는 곳에서 실종된 등반가는 따로 시신을 수습하지 않으며, ‘산에서 죽어, 산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휴먼 원정대’는 이러한 관례를 깬 유래 없는 사건이다. 실제 사건을 그대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와 달리, 극영화는 사건을 재구성하여 관객을 설득하여야 한다. 즉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고, 얼마나 불가능한 사건이며,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관객들에게 개연성 있게 보여주어야 한다.

영화 <히말라야>는 산악영화로서의 장엄함이나 산이 주는 시원적 감흥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는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렵지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감정을 전달하는 측면에서는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의미를 환기하는 것은 시의성을 지닌다.

◆ 조난된 동료 구조, 그 무모함과 숭고함 사이

영화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에서는 엄홍길(황정민)이 이끄는 산악대에 신참 박무택(정우)이 합류하여, 엄홍길의 14좌 등정 중 4좌 등정에 박무택이 함께하는 모습을 담는다. 후반부는 은퇴한 엄홍길이 박무택의 사망소식을 듣고 시체수습을 위한 원정대를 꾸린다. 영화는 극한의 배경을 그린 산악영화지만, 비장미나 엄숙함을 품지 않는다. <히말라야>에서 등정은 훈련하고 도전하고 성취하는 스포츠이지, 모호한 기행이 아니다. 등반대의 분위기는 밝고 일상적이며, 동료들은 신뢰와 우애로 가득하다.

이들은 조난된 동료를 구조하거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그런데 해발 8천 미터가 넘는 곳에서 조난자를 구조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다. 영화에도 나오듯이, 조난을 당한 동료를 구하러 나선 사람은 결국 모두 죽었다. 또한 실종된 등반가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너무 힘들어서 시도되지 않는다. 하지만 매우 특이하게도 목숨을 걸고 동료를 구조하러 나선 사람이 진짜 있었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원정대가 실재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영화는 실화에는 존재하지 않는 요소와 장치를 통해 이 예외적인 사건을 관객에게 납득시킨다.



영화 <히말라야>에서 엄홍길과 박무택이 만나는 첫 장면에서 박무택은 동료의 시신을 구조헬기에 태우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엄홍길의 눈 밖에 난다. 이것은 박무택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자, 영화 전체에 대한 복선이었다. 박무택이 이끄는 첫 히말라야 등반에서, 후배가 조난을 당하자 박무택은 구조에 나서, 후배를 먼저 하산시키고 조난된다. 박무택의 조난소식에 구조에 나선 박정복(김인권)은 동사직전의 박무택을 찾아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자신도 죽는다. 하산시킨 후배도 결국 죽었다. 애초 한 사람의 조난자를 구하려다가 세 사람이 죽은 셈이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구조하지 말았어야 옳다. 당시 구조에 나서지 않았던 다른 등반 팀 사람들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하지만 구조를 위해 달려가는 그 행위가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다. 박무택은 후배를 만나 구조했고, 박정복은 박무택을 만나 마지막 밤을 함께 했다. 이들은 모두 죽었지만, 고독하게 버려지지 않았다. 내가 조난을 당하면, 동료가 구조해 준다는 강력한 믿음 하에서 죽었다. 이러한 믿음이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이기에, 구조작업이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 없다.

조난당한 동료를 위해 무모한 구조에 나서는 행위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시신 수습을 위해 원정대를 꾸리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다. 한명을 구하기 위해 여러 명이 희생을 감수하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마션>에 대해서도 무모함과 숭고함 사이에 갑론을박이 존재한다. 하물며 시신수습을 위해 많은 이들이 희생을 감수하는 것에 선뜻 동의할 수 있는가.



◆ 효율과 성과주의만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가치

오늘날 히말라야 등정은 기업후원을 받아 이루어지는 스포츠다. 등반가로서 등정의 기회를 얻기 힘들지만, 성공하면 보상과 명예가 주어진다. 영화는 그러한 정황을 잘 보여준다. 엄홍길은 ‘14좌 등정’ 같은 양적 성과를 중시하는 국내 산악문화에서 가장 성공과 인정을 얻은 사람이다. 그런데 시신 수습을 위한 원정은 이러한 성과주의와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이다. 등정보다 훨씬 힘든 미션이지만, 아무런 영광도 보상도 없다.

천신만고 끝에 시신을 찾은 엄홍길은 베이스캠프에 와 있던 박무택의 아내와 통화한다. 이 장면은 실화와 다르지만, 관객의 고조된 감정을 응결시키고 원정의 의미를 매듭지어주는 중요한 효과를 지닌다. 박무택의 아내는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한 등반대에게 고마움을 담아 더 이상 운구하지 말 것을 정중히 부탁한다. 등반대는 양지바른 암벽에 돌무덤을 만드는 것으로 미션을 마친다. 효율과 성과를 중시하는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바보짓이 아닌가. 죽은 지 1년이 다 된 시체를 빙벽에서 떼어내어 고작 백여 미터 떨어진 암벽에 묻기 위해 등반대들이 오십여 일 간 히말라야를 헤맸단 말인가.



영화 <히말라야>는 이를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각자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업까지 팽개치고 히말라야에 다시 온 것이 온전히 납득되지는 않는다. 이 대목에 있어서 영화가 사람들 간의 관계를 더 입체적으로 그렸더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이들의 관계를 완전히 매끈하게 그리지 않은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가령 조명애(라미란)는 자신이 박무택을 질투했음을 말한다. 엄홍길이 신참인 박무택에게만 등정의 기회를 주는 것 같아 ‘내가 여자여서 차별받는다’ 생각했다는 것이다. 여성대원은 실화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로, 영화화의 과정에서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조명애의 생생한 토로는 엄홍길이 박무택을 각별하게 생각해왔음을 객관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사실 엄홍길과 박무택의 관계는 남성중심의 도제관계 속에서 적자로 인정받는 공고한 사제지간을 보는 듯 했다. 실제로 박무택은 엄홍길의 수제자가 되어, 엄홍길에게 배운 것을 후배들에게 그대로 가르치는 ‘리틀 엄홍길’이 되어간다. 이러한 모습은 어느 조직에나 존재하는 순혈주의적 줄 세우기나 유리천정 등을 연상시킨다. 영화가 조명애의 말을 통해 이러한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고, 엄홍길이 그것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는 장면은 영화가 지닌 남성중심의 정서를 일시에 중화해준다. 또한 이들은 모두 박무택에 대해 좋은 감정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무택의 시신을 찾는 무모한 여정에 동참하였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시킨다.



◆ 시신에 대한 예의는 과연 무엇인가

그들은 왜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 자신의 생활을 포기하고 나선 것일까. 그것은 죽은 박무택이 바로 자신일 수 있으며, 내가 같은 일을 당했다면 박무택도 반드시 그리 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몸이 자일로 묶여 있듯이, 우리의 삶과 죽음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몸의 감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서 효율이나 성과가 아닌 ‘인간에 대한 예의’를 논할 여지가 생긴다. 그런데 시신은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맞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생물학적 죽음과 동시에 사물로 변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맺은 사회적 관계가 시신에 남아있기 때문에, ‘시신에 대한 예의’도 존재한다. 시신에 남아있는 사회적 관계를 거두는 과정이 바로 애도와 장례식이다.

박무택의 시신을 거둠으로써 새로운 화해가 이루어진다. 최선을 다한 애도행위를 통해 박무택을 향한 조명애의 질투나 박무택을 구하지 않았던 사람의 죄의식이 사라진다. 박무택의 아내 역시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내려놓고 그와의 사랑을 간직한 채 이후의 삶을 살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엄홍길은 조명애와 더불어 정상에 오른다.

십년 전 아무런 보상도 명예도 없지만, 한명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히말라야 빙벽을 헤맨 원정대가 있었다. 그러나 십년 후 앞바다에 수장된 아홉 명의 시신을 수습하고 세월호를 인양하는 일이 무의미한 낭비일 뿐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히말라야>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기획된 영화이다. 그러나 운명처럼 당도하여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부디, 인간과 시신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히말라야>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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