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낙법이 필요한 건 강호동만이 아니다


제13강. 낙법 [落法] [ -뻡]

[명사]
1. [체육] 유도나 체조 따위에서, 메치기를 당해서 나가떨어지든지 갑자기 넘어지게 되는 경우에 아무런 위험도 없이 자기의 몸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방법.
2. 이걸 배워야 제 몸을 보호하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엔터미디어=이승한의 TV키워드사전] 만신창이다. 제일 가운데 메인 진행자 자리는 얼결에 김희철에게 내줄 뻔 했고, 괜히 기합이 빡 들어간 진행은 옛날 식 진행이라고 타박을 들었으며, 정력왕을 뽑는 테스트들은 죄다 망쳤다. 잘 먹는 게 나름의 자랑거리이자 특기였던 과거가 무색하게 냄새로 음식 맞추기 대결에서도 밀렸고, 제한된 시간 안에 어묵 많이 먹기 대결조차 자신보다 덩치가 작은 민경훈에게 밀려 지고 말았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어묵을 삼키지도 못한 채 어묵 세 꼬치를 한 손에 들고 노려보다가 노호를 지르고는 “못하겠다”라고 내려놓는 그는, 그래, 확실히 늙었다. 최근 새로 시작한 JTBC 예능 <아는 형님>에서의 강호동은, 왕년의 야생호랑이란 별호가 무색하게 연전연패를 기록하고 있다. 이수근과 김영철이 장악하고 심지어 루키인 서장훈까지 한 몫을 하는 콩트 타이밍, 강호동은 종종 초조한 마음에 무리수를 던지고는 힐난을 당한다.

<아는 형님>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같은 방송사의 <마리와 나>에서, 강호동은 자기 손바닥만한 스코티시 폴드 고양이를 처음 보는 자리에서 무섭다며 주춤거렸다. 예전 같으면 그냥 괜한 엄살이겠거니 싶은 장면이 이젠 엄살처럼 보이지 않는다. 팔씨름이라던가 씨름 경기에서 상대에게 일부러 져준 것 아니냐는 의혹을 듣던 거야 옛날 얘기고, 요즘엔 진심으로 버거워 하는 게 눈에 보인다.

KBS <우리동네 예체능> 유도편에서 긴장으로 몸이 굳은 채 진땀을 흘리며 잡기 싸움을 하는 그를 보라. 천하장사도 세월 앞에선 나이를 먹고, 식사량이 줄고, 후배에게 구박을 당하고, 한참 어린 상대에게 눈 깜짝할 사이에 한판 패를 빼앗기고, 새끼 고양이 앞에서 떨다가 제 아들을 처음 안아봤던 순간을 떠올리고 난 다음에야 마음을 가라앉히는 애 아버지가 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게 몹시 자연스러워졌다.



원래도 강호동은 약점을 공격적으로 활용하면 했지, 드러내길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주는 위압감이 양날의 검이란 걸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걸 “무서움 속에 귀여움이 있다”는 우스꽝스러운 자평으로 희석시켰던 사람이다. 그의 곁엔 늘 그의 지식 부족이나 식탐, 명언 강박을 놀려줄 이들이 있었다. KBS ‘MC 대격돌’에선 유재석이, KBS <1박 2일>에선 이수근과 이승기가, MBC <무릎팍 도사>에선 유세윤이, SBS <스타킹>에선 이특과 붐이 그랬다.

하지만 세금 과소 납부 의혹으로 잠정 은퇴를 했다가 돌아온 이후 강호동은 좀처럼 자기 약점을 명확하게 보지 못했다. 그는 세게 질문해야 할 자리인 <무릎팍 도사>에선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두려워 겸손히 경청만 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몸을 쓰는 예능 대신 책을 읽는 KBS <달빛 프린스>를 시도했다가 쓴맛을 봤다. SBS <맨발의 친구들>은 7개월 내내 콘셉트를 명확하게 하지 못한 채 헤매다 끝났고, 스타와 팬의 만남을 표방한 MBC <별바라기>는 강호동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종류의 쇼였다.

그렇게 그가 헤매는 동안, 예능의 조류가 바뀌었다. 과장된 오프닝과 엔딩 멘트로 장식되곤 하던 리얼 버라이어티는 점점 일상을 엿보는 관찰예능 위주로 재편됐고, 토크쇼는 게스트의 인생역정을 전해 듣는 쇼에서 시사, 정치, 경제, 성 등 특정 주제를 놓고 전문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쇼들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강호동처럼 힘 있게 리드하고 완력으로 압도하는 이 대신 곰살맞게 물어보고 조심스레 깐족대는 말재간을 지닌 이들이 메인 MC의 자리를 차지했다.



1993년 방송 데뷔 이래 처음으로, 그는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 됐다. 민망하게도 강호동은 자신의 수많은 약점 중 제일 최근에 추가된 ‘옛날 사람’이란 타이틀을 아주 오랫동안 불편해 했다. 그도 그럴 법하다. 방송인 데뷔 이래 차근차근 정상을 향해 올라온 탓에 한 번도 큰 실패를 맛 본 적 없었던 사람이었으니, 처음 맞아보는 슬럼프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알기 어려웠으리라.

그가 힘도 식성도 개그방식도 다 예전 같진 않단 점을 인정하기 시작한 건 <우리동네 예체능>이었다. 본인이 일찌감치 “동물적 감각”이라 표현한 적 있는 가공할 신체능력을 100% 활용하기 좋은 무대인 <우리동네 예체능>에서조차, 강호동은 몇몇 종목들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해 벤치 신세를 져야 했다. 예체능 팀이 연전연승의 기록을 쓰기 시작했던 농구 편에서 스포트라이트는 줄리엔 강과 김혁, 서지석에게 돌아갔고, 축구 편에서는 양상국과 민호, 이기광, 윤두준이 팀을 이끌어가는 걸 지켜봐야 했다. 경기에서 활약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지만 여전히 출연자들을 대표해 메인MC로서 프로그램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 강호동은 점차 자신이 못하는 종목이 있다는 걸 겸허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래야 비로소 웃으며 진행을 할 수 있었으니까.

이후 새롭게 선보인 프로그램들에서, 강호동은 점차 자신이 시대의 속도를 못 따라잡았다는 사실을 농담의 소재로 편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과거 <1박 2일>을 함께 했던 이들과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춘 탓에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시차를 더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던 tvN go <신서유기>에선 이게 숫제 노골적이었다. 제작진은 좀처럼 기계와는 친한 적 없던 강호동에게 중국어로 된 ATM기를 사용하게 하거나 블루투스 스피커와 스마트폰을 연결하는 것을 미션으로 던져줬고, 그가 조금이라도 옛날 투의 진행을 선보이려 하면 천적인 나영석 PD의 입을 빌어 “형, 그거 옛날 거야.”라고 면박을 줬다.



중국에서 돌아와 새로 선보인 <마리와 나>와 <아는 형님>에서, 그는 이제 자신이 예전 같지 않음을 무기 삼아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가운데자리에 서느냐를 놓고 아웅다웅하거나 잘 먹는 캐릭터를 민경훈에게 빼앗겼다며 부들거릴 때, 강호동은 더 이상 경직되어 있거나 어색해 보이는 일이 없다.

<우리동네 예체능> 팀이 수련 중인 유도는 여느 무술이 그렇듯 낙법의 중요성을 몹시 강조한다. 등을 내주는 게 아니라 최대한 앞이나 옆으로 바닥에 닿아야 한판을 안 내줄 수 있으니까. 제대로 넘어지는 법을 배우기 전엔 남을 메치는 법을 배울 수 없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사람은 쓰러질 때 본능적으로 그 상황을 피하려 팔을 뻗어 땅을 짚으려 들거나, 쓰러지는 중이란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채 잘못된 자세로 넘어지다가 다치곤 한다.

낙법의 요체는 자신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중이란 사실을 최대한 빨리 깨닫고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추락에 대응해 이런 불상사를 막는 것에 있다. 예능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신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라면, 그 상황을 인정하고 그 상황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재기가 시작되는 것이리라. 상황을 어설프게 모면하려 억지로 용을 쓰거나 상황 자체를 부정하다 부상을 입는 대신 말이다.



모든 예능인들은 슬럼프를 겪는다. 모두 아는 것처럼 유재석은 데뷔 초부터 아주 오랜 시간 끝도 안 보이는 부진의 터널 속을 헤맸고, 신동엽 또한 리얼 버라이어티의 시대를 극복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김국진은 과연 복귀가 가능할까 의심이 될 정도의 고통스런 시간을 통과한 후에야 간신히 방송을 할 수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 크게 티가 안 나서 그렇지, 이경규 또한 숱한 슬럼프와 재기를 반복하며 여기까지 왔다.

모두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한 이들이다. 마치 김국진이 오랜 공백기 이후 돌아왔을 때 골프, 이혼, 냉동인간 등의 키워드를 온전히 받아낸 것처럼. 이경규가 <복수혈전> 제작 실패와 부채관계에 대한 농담을 무기로 삼았던 것처럼. 자신의 약점을 무기 삼는 것은 예능의 기본이지만, 그러려면 그게 약점이란 사실을 먼저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아마 강호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이 낙법의 비유를 예능뿐 아니라 평범한 장삼이사인 우리의 삶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15년은 모두에게 쉽지만은 않은 한 해였다. 사회 전반의 신뢰도가 떨어져 아무도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시대, 정치적으론 불안정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계속 됐고, 경제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안 좋아졌다. 많은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도처에서 넘어졌다.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든 부정하기 위해 온갖 이야기들이 등장했다. “북한에 비하면 남한은 천국이나 다름없는데 왜 ‘헬조선’이라고 부르냐”는 정신승리부터, “한국은 K-POP도 세계적으로 흥하고 영화도 수출하고 한국음식도 각광받는 추세이니 프리미엄 국가다”라는 기괴한 캠페인 광고, “너희는 우리 세대와는 달리 좀처럼 노오오오력을 안 하는데, 노오오오력을 하면 안 넘어질 수 있다”는 훈계까지. 물론 그 중 어떤 것도 넘어지는 우리 시대를 붙잡아주지 못했다. 그러니 새해의 우리에게 당장 시급한 건 우리가 넘어지고 있다는 자각과 겸허한 인정인지 모른다. 바야흐로 낙법이 필요한 시대, 2015년 한 해 모두 고생하셨다.

칼럼니스트 이승한 tintin@iamtintin.net

[사진=JTBC, tvN go,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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