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우진의 잡학시대] 최근 영국의 한 야생동물원에서 고릴라가 직립보행하는 모습이 유튜브에 올려졌다. 영국 켄트 포트 림 야생동물원에서 촬영된 18초 분량의 동영상에서 이 고릴라는 두 발로 상당한 거리를 걸었다.

원시 인류가 침팬지나 고릴라 같은 ‘친척’과 달리 오늘날 모습으로 진화한 결정적 계기는 직립보행이다. 그렇다면 최근 서서 걷는 고릴라와 그 고릴라가 속한 무리는, 진화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과 조건이 주어진다면, 인류에 버금가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영장류는 나무에서 사는 종류와 나무에서 내려온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주로 나무 위에 머무는 침팬지는 안전을 유지한 대신 두 손의 자유는 얻지 못했다. 침팬지는 가끔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을 사냥해 단백질을 보충하지만 주로 초식한다. 위협적인 포식동물이 별로 없는 지역에 살던 영장류는 나무에서 내려와 고릴라처럼 됐다. 고릴라는 엉거주춤하게나마 두 다리로 걷는다. 그래서 두 손이 자유롭다. 하지만 고릴라는 그 손을 주로 먹이를 채취해 입에 넣는 데 쓴다. 고릴라는 도구를 만들지 못한다. 돌이나 나뭇가지를 활용할 뿐이다.

나무에서 내려온 원시 인류는 고릴라와 달리 직립보행으로 성공을 거뒀다. 성공의 첫째 요인은 골격과 근육이 달리기에 적합하게 바뀐 진화였다. 원시 인류는 직립보행이 아니라 달리기를 통해 비로소 도약을 이룬 것이다.

원시 인류는 들짐승을 잡을 만큼 빨리 달리지는 못했지만, 목표로 삼은 들짐승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을 정도의 속도는 냈다. 원시 인류는 먹잇감으로 찍은 한 마리를 줄기차게 쫓아다녔다. 그러다 그 들짐승이 지쳐 쓰러지거나 헐떡이며 멈춰서면 일제히 달려들었다.

뛰지 못하던 때엔 이런 사냥이 가능하지 않았다. 멋잇감은 거리를 점점 벌리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런 상황에선 하루 종일 쫓아다녀도 어느 한 마리도 지쳐 쓰러지게 만들 수 없었다.

달릴 수 없어도 도구를 더 잘 만들면, 예를 들어 창이나 활을 만들면 사냥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비약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이야 창이나 활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두 무기는 원시 인류가 달려서 처음 사냥한 지 여러 백만년 이후에야 발명됐다.

이런 의문도 나올지 모르겠다. ‘원시 인류가 수렵 말고 농사부터 시작했다면 힘들여 달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 의문에 대한 답도 앞과 비슷하다. 농경은 구석기 시대가 막을 내린 뒤에, 그러니까 약 1만년 전 신석기 시대에야 가능해졌다. 원시 인류는 기나긴 직립보행과 수렵 기간을 거쳐 ‘얼마 전에야’ 농경 시대로 들어섰다.

원시 인류의 진화는 골격 및 근육에 그치지 않았다. 골격 및 근육이 달리기에 적합하게 바뀌었어도 다른 조건이 같았다면 원시 인류는 오래 달리지 못했다. 둘째 기적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오래 달리기를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조건이었다. 털이 빠지고 땀을 흘리게 된 진화였다.

먹이사슬의 위로 갈수록 속도가 빨라진다. 육지에선 치타가 가장 날래다. 치타는 속도는 최고이지만 오래 달리지는 못한다. 그래서 먹이사슬 아래에 있는 초식 동물은 치타와 충분한 거리를 유지하면 치타에게 잡히지 않는다.

인류는 육식인 치타보다 느린 것은 물론이고, 초식 동물에도 속도가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도 초식 동물을 오래 쫓아다녀 잡은 비결은 오래 달리는 능력이었다. 초식이건 육식이건 다른 동물은 체온이 오르기 때문에 오래 달리기에 한계가 있다. 인류는 빠르진 않아도 오래 뛸 수 있다. 뛰는 동안 땀을 흘려 체온을 낮추는 덕분이다.

먹잇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쫓아다니는 단순한 사냥법은 아직도 아프리카의 몇몇 소수 종족이 잘 써먹고 있다.

사냥에 성공하면서부터인지, 그 전부터인지 인류는 머리도 좋아졌다. 직립보행 이후 자유로워진 손으로 도구를 만들었다. 돌을 깨 사냥 도구로 썼다. 수렵은 인류에게 시간을 선물했다. 풀과 열매 위주로 영양을 섭취하던 때에 비해, 고칼로리의 고기가 식단에 추가된 뒤엔 먹는 데 들이는 시간이 줄었다. 인류는 남는 시간에 놀지만은 않았다. 더 좋아진 솜씨로 움막을 짓고 더 많은 도구를 만들었다. 고칼로리 음식과 놀이, 그리고 도구의 제작과 활용은 인류의 두뇌를 다른 어떤 동물의 뇌보다 성능이 좋게 만들었다. 그렇게 진화한 뇌는 우리 몸에서 무게는 2%밖에 차지하지 않지만 에너지는 20%를 소모한다.

인류가 걸어온, 아니 달려온 진화의 길은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오늘날 인류는 수백만년에 걸친 몇 가지 기적이 응축된 존재다. 둘째 우리 몸은 걷기가 아니라 달리도록 설계됐다. 잘 달리고 잘 살아야겠다.

한편 털이 빠진 뒤 인류의 피부에서 기생하는 벌레가 서식할 수 있는 ‘지역’이 단절됐다. 위와 아래로 나뉘었다. 그래서 인류가 진화하면서 위에서는 머릿니가, 아래에서는 사면발이가 살게 됐다. 피부 기생충이 둘이라는 점도 인류가 다른 영장류와 다른 특징이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cobalt@joongang.co.kr


[사진 = 유튜브 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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