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 이 정도로 행복감을 전해준 드라마 있었던가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사실, 덕선(혜리)의 남편이 누구인지는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중요치 않았다. 주인공인 덕선과 택이(박보검)의 결혼식 대신 보라(류혜영)와 선우(고경표)의 결혼식이 마지막 화를 장식한 이유이기도 하다. <응팔>은 청춘을 말하지만 연애대신 잊혀진, 잊혀져가는 가치를 그렸다. 신파의 간이 세긴 했지만 가족과 이웃, 그리고 단짝 친구들이라는 일종의 판타지를 제공했다. 그 시절로 돌아가는 추억여행만큼이나 행복한 삶에 대한 동경을 자아냈다. 1인가족의 시대, 이웃공동체가 조각난 시대에 ‘공동체’가 주는 안정감과 추억의 아련함. 디테일 면에선 고증을 추구했으나 이 드라마가 그린 것은 리얼리티가 아닌 판타지였다. 지금은 멀어진 1988년은 그렇게 낭만의 시대가 됐다.

<응팔>의 쌍문동 골목에는 이웃 간의 다툼도 셋방살이의 서러움도, 방황하는 청춘도 없었다. 경제적으로나 진로 문제도 더할 나위 없이 잘 풀렸다. 이웃 간의 우애가 넘치고, 아이들의 우정은 돈독했다. 행복한 쌍문동의 골목길은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과 그 시절의 실체를 아는 시청자들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웃과 가족의 가치가 줄어드는 오늘날 추억과 지나간 시간이란 필터로 가족과 이웃, 친구의 가치가 가진 행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우 엄마와 택이 아빠 커플을 기점으로 드라마는 본격 연애 이야기로 접어들면서 톤이 변하기 시작한다. 따뜻한 가족 드라마는 ‘8시 드라마’에서 봄직한 등장인물 대부분이 서로서로 관계를 맺는 상황으로 접어든다. 마지막 화의 갈등이었던 동성동본이나 겹사돈 등의 문제가 그런 예다. 여기서 문제는 가족 이야기가 연애 이야기로 전환될 때 선우 엄마 네 커플을 제외하면 캐릭터와 감정선이 급격하게 변한다는 데 있다.

독단적인 성격이 매력이었던 보라는 한 순간에 지고지순한 사람이 되고, 마지막까지 덕선과 정환(류준열) 그리고 택의 풋풋한 첫사랑 삼각관계가 어떻게 정리됐다는 건지 이야기가 없다. 택이가 친구들에게 고백을 한 이후, 정환은 그로 인해 갈등을 하고 끝끝내 고백을 하지 못하지만 어떤 치유나 결론 대신 사라지는 것으로 정리된다. 동네 친구 중 한 명인 도롱뇽(이동휘)은 쌍문동에 연애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할 때부터 사라지고 말았다.



기어코 흐르는 시간은 아련함을 남긴다. <응팔>은 순정만화와 아다치 미츠루 식 청춘 성장 코드를 연애가 주가 아닌 ‘가족애’의 틀로 풀어낸 매우 새로우면서도 완성도 높은 이야기였다. 마지막에 인물들의 현재가 아닌 한 집, 두 집 이사를 가면서 텅 빈 골목을 보여주는 것은 이 드라마의 중심이 가족 이야기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가족 드라마의 정서가 남편을 찾는 구조를 만나며 석 달간 즐겼던 판타지에 구멍이 생겼다. 급변화한 캐릭터, 설명이 안 되는 관계들, 그리고 고루 조명 받지 못한 인물들의 존재는 해피엔딩으로 치닫기 위한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성장과 청춘을 연애가 아닌 가족과 우정, 공동체로 풀어가며 얻었던 판타지, 정서적 기반이 흔들리고 말았다.

연출을 맡은 신원호 PD는 가족 이야기가 남편 찾기에 가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남택’ ‘어남류’로 요약되는 남편 찾기는 드라마의 후반부를 책임질 퍼즐이자, <응답하라>의 시리즈를 관통하는 인장과 같은 구조였다. 그런데 <응답하라 1988>이 이전 시리즈에 비해 더 나은 평가를 받고, 다양한 세대로부터 높은 인기를 구가한 것은 이웃과 친구, 동네를 ‘가족애’란 코드로 풀어낸 추억 보정 판타지 때문이다.



한 가족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겪게 되는 여러 보편적 국면들을 가슴 따뜻하게 다루면서 전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대를 얻어냈지만 청춘의 상징이라 할 만한 연애 이야기와 융화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덕선의 삼각관계에 관심을 가졌던 시청자들은 이해 못할 개연성에, 쌍문동 친구들에 애정을 쏟은 시청자들은 하나 둘 사라진 친구들에게서 쫓아가던 동력을 잃었다. 이 두 커다란 줄거리 사이의 부정교합은 가족드라마로 접근한 시청자들이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하라 1988>은 박수를 받아야 한다. 아쉬움은 남지만 이들이 준 행복은 더욱 컸다. 골목길 이웃들이 만들어낸 아기자기한 이야기는 2016년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논란과 함께 치솟은 시청률은 궁금증이 아닌 아쉬움 때문이다. 1980년대 <둘리>가 쌍문동을 서울의 전형적인 서민 동네로 보여줬다면 2016년 <응팔>의 쌍문동은 우리 마음속 행복한, 그리운 동네라는 판타지를 보여주었다. 판타지는 팍팍한 현실의 윤활유가 됐다. 행복감을 이 정도로 직접적으로 전해준 드라마는 없었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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