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란·김인권, 아무리 작은 역할도 빛내는 흔치않은 소중한 배우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모호한 정보에 따르면 배우 라미란은 경기 북부에, 배우 김인권은 경기 남부의 어느 도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이 머무는 도시는 위성도시, 그리고 지구의 주위를 도는 위성은 달이다. 달은 지구보다 작지만 달은 지구의 많은 것을 움직인다. 그건 단순히 밀물과 썰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밤하늘의 달은 지구에 사는 인간에게 낭만을, 아름다움을, 노래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 라미란과 김인권의 연기는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할지라도 그들이 등장하는 작품에 하나의 은유나 상징 혹은 인상적인 멜로디가 된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동성 성폭행을 당하는 불쌍한 여죄수이자 조각가로 등장한 라미란은 짧은 분량이지만 강렬한 두 얼굴을 보여준다. 뚱뚱한 여죄수의 사타구니 사이에 쪼그려 앉아 울먹이던 여인과 금자에게 모호한 목소리로 “왜 눈만 새빨갛게 칠하고 다녀?” 라고 묻는 두 사람은 같은 배우지만 전혀 다른 얼굴이다. 마치 교도소 안과 밖이 전혀 다른 금자의 모습이 비춰지는 냉소적인 거울처럼 말이다.

한편 김인권이 데뷔작에서 보여준 강렬함 또한 대단하다. 영화 <송어>에서 순박하고 야생의 체취가 짙게 밴 시골청년으로 등장한 그는 말끔하지만 알고 보면 비열하고 겁쟁이인 도시의 남자들과 대비되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영화 속의 이 작은 소년은 선명하고 진하다.

라미란과 김인권이 함께 출연한 영화 <히말라야>에서 이 두 배우의 분량은 그리 크지 않다. 영화를 끌어가는 주인공은 당연히 각각 엄홍길 역과 박무택 역을 맡은 황정민과 정우다. 하지만 분량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둘을 약방에 감초라고 말하기에는 좀 미안한 구석이 있다. 여성등반대원 조명애 역의 라미란과 박무택의 선배로 등장한 박정복 역의 김인권이 없는 <히말라야>라면 아무래도 ‘히마리’가 없을 것만 같다.



<히말라야>는 규모는 크지만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나 신파극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큰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남자대원들에게 밀려 대장과 함께 정상에 오르지 못한 상처가 있는 조명애를 통해 영화는 무언가 의미 있는 곁가지를 잠시 뻗는다. 더불어 그 조명애 이야기가 <히말라야>에서 겉돌지 않게 영화 안에서 긴장감을 죽이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준 라미란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김인권은 박정복을 통해 초반 영화 속 감초의 역할과 조난당한 박무택을 혼자 찾아내는 중심역할을 동시에 해낸다. 그리고 김인권이 박무택을 찾아낸 뒤에 보여준 장면들은 이 영화를 신파에서 감동 쪽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한편 영화 <히말라야>의 라미란과 김인권의 분량이 아쉽다면 다른 작품 쪽으로 눈을 돌려도 좋을 듯하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라미란으로 등장한 라미란은 이 드라마를 다른 <응답> 시리즈와 구별시키는 주는 인물이다. 이 극에서 예능프로그램 혹은 <영애씨> 시리즈에서 보았던 배우 라미란은 없다. <응답하라 1988>의 라미란에서 배우 라미란은 그 시절에 있을 법한 돈 많고 적당히 속물적이지만 인간미를 잃지 않은 1980년대의 중년부인을 자연스럽게 재현해낸다. 마치 JTBC <맏이>에서 1970년대 기억 속 미제이모 역할을 딱 그때 그 사람인 것처럼 연기했듯이 말이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에 얼룩말무늬나 호피무늬 옷을 입고 휘젓는 라미란은 <응답하라 1988>에서 결코 코믹을 위해 오버하지 않는다. 그녀는 담담히 하지만 섬세하게 그 시절 여인들의 했을 법한 포즈나 농담 표정 등을 노련하게 재현한다. 그리고 그 덕에 <응답하라 1988>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1988년 추억 속의 어느 날로 인도했다. 어떤 시절로든 어떤 상황으로든 자연스럽게 보는 이를 이끄는 라미란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매력적인 손길은 이 배우가 지닌 가장 큰 곡예술이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김인권이 주연한 2015년 영화 <약장수>는 한번쯤은 눈여겨 볼 법한 이야기다. 노인층을 상대로 하는 홍보관 흔히 ‘떴다방’ 약장수 이야기인 이 영화는 우스꽝스러운 포스터를 보고 예측할 수 있는 흔한 코미디 영화는 아니다. <약장수>는 홀로 사는 노파와 아이의 치료비를 위해 떴다방 직원으로 나선 가난한 가장 사이에 흐르는 따스하고 미묘한 온기를 다룬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우리가 살피지 않던 삶의 구석 어딘가의 쓸쓸한 풍경을 묘사한다. 물론 기대와 달리 <약장수>에서 두 사람의 소소한 온기는 현실 속에서 처참한 결과로 막을 내린다.



사실 영화보다는 오히려 웰메이드 <베스트셀러 극장> 같은 단막극에 어울리는 규모이긴 하다. 하지만 주인공 일범을 연기하는 김인권과 혼자 사는 노파 옥님을 연기하는 이주실이 보여주는 앙상블은 이 작은 소품에 큰 울림을 주기 충분하다. 무엇보다 <방가, 방가>의 방가에서부터 주변부 변두리 남자의 달곰씁쓸하게 코믹한 페르소나를 얻은 김인권은 <약장수>로 이런 종류의 캐릭터와 연기에 코믹함만이 아닌 깊이까지 담아낼 줄 알게 된 것 같다. 그렇기에 영화는 생각보다 묵직하고, 따듯한 신파의 주변을 맴돌다가 어느새 하드보일드의 그늘 속에 멈춘다.

하지만 명절용 특집영화로도 은근히 어울릴 법한 이 영화를 브라운관에서 볼 기회가 있다면 김인권의 연기를 꼭 눈여겨보기를 바란다. 지금 이 시대의 대중문화는 주변부 변두리 남자들의 내면이나 고민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늘 범죄자, 광대, 지나가는 인물로 쉽게 소비된다. 그런 주변부의 남자들에 진솔한 깊이와 무게를 담아낼 줄 아는 김인권은 흔치않은 소중한 배우임에 틀림없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영화 <히말라야><약장수>,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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