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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오독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잔인한 후폭풍
기사입력 :[ 2016-01-29 12:45 ]


당신은 TV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수신하고 있습니까


제15강. 페럿 [Ferret]


[영] [명사]
1. [동물] 유럽긴털족제비 품종의 하나
2. 동물은 장난감이 아닙니다. 같이 살려면 페럿을 당신의 삶에 맞추는 게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페럿의 삶에 맞춰가야 합니다.


[엔터미디어=이승한의 TV키워드사전] 집에 들어가는 길, 어두운 밤의 골목에 검고 길쭉한 동물 하나가 눈앞을 휘리릭 스치고 지나갔다. 족제비의 일종인 페럿이었다. 뭐지? 페럿은 처음 보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잡아서 동물보호단체에 신고해야 하나? 혹시 동거인의 인적사항이 적힌 목걸이 같은 걸 차고 있진 않을까? 하지만 페럿은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하필이면 기온이 영하 두 자릿수로 하강하는 유달리 추운 밤이었다. 어떻게든 내가 잡아야 했던 건데. 불가항력의 속도로 도망갔으니 어찌 할 수 없었던 게 당연한 일인데도, 페럿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 자책하는 마음에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얼마 뒤 친분이 있는 수의사로부터 불편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최근 들어 병원에 페럿이나 아메리카너구리 라쿤을 키우고 싶다며 상담을 해 오는 사람의 수가 부쩍 증가했다는 것이다. JTBC 새 예능 <마리와 나>에 라쿤과 페럿이 등장한 것을 보고, 집에서 라쿤이나 페럿을 키우게 해달라고 조르는 자녀들의 등쌀이 세졌다는 게 이유였다. “조만간 유기 페럿들이 부쩍 늘겠죠. 유기되는 동물의 종류가 다양해 질 거예요.” 수의사의 한숨 섞인 말에 “그럴 리가요.”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었다. 당장 눈앞에 지나가는 유기 페럿을 보지 않았는가. 유기된 아이가 아닐 수도 있지 않느냐고? 그럼 설마하니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페럿이 자생 했을라고.

물론 프로그램의 잘못은 아니다. <마리와 나> 제작진은 라쿤과 페럿이 결코 함께 살기 쉬운 동물이 아니며, 각오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덥석 동거를 결정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 될 수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페럿이 단순히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같이 살기엔 그 습성이나 체취가 야생에 가깝다거나, 등장한 라쿤들 또한 한 차례 파양(입양취소)의 아픔을 겪은 아이들이란 사실은 프로그램 안에서 잘 설명되는 편이다. 그러나 동물을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애완의 대상으로만 보는 이들에게 그런 정보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여전히 “우리 애가 하도 졸라서”라며 별 각오도 없이 덜컥 입양을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동물권에 대해 오랜 세월 이야기해 온 SBS ‘TV 동물농장’도 사정이 비슷하다. ‘TV 동물농장’이 2014년 1월 인간과 고양이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충주댐 휴게소를 방송에 소개한 이후, 감시하는 이들의 눈을 피해 악의를 품은 이들이 충주댐 휴게소를 찾기 시작했다. 키우던 고양이를 버리러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고양이를 학대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산탄총에 맞은 고양이가 나온 것이 같은 해 4월이었고, 지난해 10월엔 누군가 사료에 약을 타서 고양이들을 집단 독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충주댐 휴게소의 고양이들은 이제 사람의 손길을 피해 최대한 구석으로 숨어 산다.

충주댐 휴게소만의 일이 아니다. ‘TV 동물농장’이 인간과 동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례를 훈훈한 미담이라고 소개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평화를 깨고자 하는 사람들이 현장에 나타난다. 2014년 종로 금은방 골목의 명물 고양이로 소개된 ‘나비’는 방송 직후 실종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사례들이 제작진에게도 뼈저린 아픔이었던 건지, 2015년을 마무리하는 방송으로 ‘TV 동물농장’은 ‘길고양이의 수난과 눈물’이란 에피소드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학대와 오해를 멈춰줄 것을 호소했다.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TV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들은 대부분 선의를 가지고 프로그램 제작에 임한다. 당연히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을 다뤄 좋은 시청률을 확보하는 것이 제1의 목표이겠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이 만드는 프로그램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길 원하는 게 인지상정이니 말이다. 인간과 동물의 교감과 평화로운 공존, 세속의 세계를 등지고 자연을 벗삼은 사람들의 이야기, 노모를 모시고 사는 순박한 효자의 미담 같은 것들을 보여줄 때 제작진이 바라는 바는 명확하다. 사람들이 이처럼 다들 동물을 사랑하기를, 바쁜 일상 속에 매몰되지 말고 잠시 자신을 돌아보기를, 모두가 TV 속 저들처럼 옆에 있는 가족에게 더 상냥하기를.

그러나 TV는 광범위한 수용자층을 지닌 매체이고, 그 ‘광범위한’ 수용자 중엔 늘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마리와 나>를 보고도 별 고민 없이 라쿤이나 페럿 입양을 결정하는 이 정도야 그나마 약과일까. ‘TV 동물농장’에 소개된 길고양이들을 찾아가 학대하는 이, KBS <인간극장>에 소개된 산골 속 가족을 찾아가 CF 출연료를 내놓으라고 강도질을 하다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와 후원회장을 자처하면서 후원금을 횡령하는 이…. 세상은 무엇을 보여주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이들로 가득하고, 그 탓에 메시지는 자주 오독되며 그로 인해 종종 프로그램 제작진들이 전혀 뜻하지 않은 잔인한 후폭풍이 발생하기도 한다.



TV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TV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재미 위주로만 소비하며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다 보면 인식의 폭이 협소해지고 스스로 생각해 판단하는 힘이 줄어드니까. 괜히 옛 어른들이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하지만 TV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TV를 보고 있는 내 자신의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는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지성은 일단 어떤 의견을 채택한 뒤에는...모든 얘기를 끌어들여 그 견해를 뒷받침하거나 동의”하기 때문이다. TV의 메시지만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기 전에, 먼저 나는 TV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수신하고 있는지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이다.

라쿤이나 페럿이 같이 살기 까다로운 동물이며 그 탓에 중도 포기하고 유기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정보를 접한 이후에도 덜컥 키우고 싶단 생각을 하는 건, 내가 동물을 단순히 귀여워 할 장난감처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길고양이와 인간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방송을 보고도 굳이 찾아가 학대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저 내가 고양이를 싫어하기 때문은 아닐까. TV 속 미담의 주인공을 보면서 그의 삶보다 그가 TV 출연을 통해 번 돈에 더 관심이 간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문제가 아닐까. 어쩌면 우리 자신의 경솔과 악의를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따져보는 것이야말로 반복해서 들려오는 씁쓸한 소식을 막는 첫 걸음인지도 모른다.

칼럼니스트 이승한 tintin@iamtintin.net

[사진=JTBC,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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