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소리’, 가장 탈정치적인 서사로 가장 첨예한 정치를 말하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로봇, 소리>는 불시착한 인공위성 같은 영화이다. 과연 그렇다. 단순히 불시착한 인공위성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영화 전체가 불시착한 인공위성처럼 다소 뜬금없고, 조금은 신선하며, 상당히 귀여움을 안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SF적인 상상이라니, 당연히 저예산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몇몇 장면의 때깔은 생각보다 고급지다. 영화는 SF적인 상상을 조금 가져왔을 뿐, 영화 전체는 극히 현실적이다. 영화는 휴머니즘 가족극이라는 가장 탈정치적인 서사를 풀어놓지만,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가장 정치적인 의미로 읽히는 아이러니를 지닌다.

◆ 지구 위 모든 음성 정보를 수집하는 스파이로봇

1990년 대구에 사는 김해관(이성민)은 어린 딸을 잠시 잃어버렸다가 찾는다. 일종의 복선이다. 영화는 어린 딸이 초등학생이 되고, 중학생이 되고, 학교를 졸업하는 모습을 빠르게 보여준다. 그리고 2013년, 새 주소를 달러 온 직원에게 김해관은 괜히 화를 낸다. 주소가 바뀌면 구주소를 알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집을 찾아오냐고. 그렇다. 김해관은 잃어버린 딸을 10년째 찾고 있다.

대기권 밖 인공위성 S19호는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지역을 폭격하라는 미군 본부의 교신을 듣는다. 학교에 폭탄이 떨어지고, 공포에 질린 아이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이후 S19는 지구에 정보 송신을 거부하고, 스스로 대기권 안으로 추락한다. 하필이면 추락지점이 중국과 북한이 인접한 서해임을 계측한 미군은 항공우주국(NASA)를 내세워 한국정부의 협조 하에 추락한 위성을 회수하는 작전에 돌입한다. 마침 그때 딸을 목격했다는 제보를 받고 서해 굴업도에 들어간 김해관이 바다로 추락하는 위성과 맞닥뜨린다.

인공위성이 사람의 음성으로 전화번호를 맞추고, 음성정보가 발신되는 위치를 집어내는 것을 보고 김해관은 깜짝 놀란다. 김해관은 인공위성이 잃어버린 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생각하고, 인공위성과 함께 달아난다. 하지만 S19호는 미군으로서는 반드시 회수해야 할 물건이다. 단순히 전파를 송수신하는 위성이 아니라, 전 세계 음성정보를 수집하고 취합하여 분석하는 스파이 위성이기 때문이다. S19호가 스파이 위성임을 알아챈 한국 국정원은 미국 측을 따돌리고 S19호를 확보하려 한다. S19가 수집한 국내외 모든 인사들의 음성정보가 정치적으로 탐나기 때문이다.



◆ 딸을 잃은 아버지가 상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로봇, 소리>는 지구 위를 돌던 인공위성을 지능과 감정을 지닌 존재로 그리면서, 외로운 지구인과의 교감을 이야기 한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이런 이야기가 한국영화에서 처음은 아니다. 애니메이션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2014)는 지구에 떨어진 인공위성이 외로운 청년과 만나는 이야기다. 짝사랑하는 청년의 구슬픈 노래를 들어왔던 인공위성은 소녀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청년을 위로한다.

<로봇, 소리>는 아프가니스탄 소녀의 비명을 듣고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바다로 투신한 인공위성이 딸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를 만나는 영화이다. 김해관은 십년 째 딸을 찾고 있지만, 아내를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은 그를 말리는 분위기다. 딸의 마지막 교신기록은 십년 전 대구지하철 화재사건의 현장이다. 그러나 김해관은 사고시각과 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딸이 그곳에서 숨졌을 가능성을 부인한다. 정확히 말하면 딸이 그곳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강한 부인(denial)은 딸과의 마지막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는 복잡한 심리와 관련이 있다. 서울의 대학에 진학해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난 딸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으려 했다. 김해관은 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강요와 간섭을 행하려다가 관계가 틀어진 상태에서 딸을 잃었다. 김해관은 인공위성이 알려주는 딸의 음성정보를 따라, 딸의 마지막 흔적을 쫓는다. 김해관은 때로 소녀처럼 구는 인공위성에 ‘소리’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티격태격 친해진 ‘소리’와 함께 국정원 직원들을 따돌리며 딸의 흔적을 쫓는 과정을 통해, 김해관은 꽉 막힌 경상도 아저씨의 성정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또한 자신이 몰랐거나 이해하려 들지 않았던 딸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된다. 그리고 매듭짓지 못했던 딸과의 감정을 해소하고, 비로소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는 벽창호 같던 중년남자가 ‘로봇 소리’와의 탈주를 통해 딸에 대한 죄의식과 아집에서 벗어나, 비명에 떠나보낸 딸과의 작별과 애도에 비로소 성공하는 과정을 담은 성장극이다.



◆ 세월호, 스노든, 국정원....

영화는 대형 참사로 딸을 잃은 아버지가 십년 동안 딸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안타깝게 담는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은 딸과의 이별은 아버지의 삶을 송두리 채 앗아갔다. 시신도 유품도 수습하지 못한 아버지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업도 팽개친 채 딸을 찾아 전국을 헤맨다. 이러한 김해관의 모습에서 세월호 참사 유족의 아픔이 생생하게 겹치는 것은 불가피하다. 또한 정보를 곧 권력으로 삼아 아무렇지 않게 사찰을 벌이는 국정원 관료들의 기세등등한 모습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는 마지막에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이 개인적 일탈로 드러났다”는 뉴스 장면을 깨알같이 박는다.

영화의 전제가 되는 스파이 위성의 존재나 이를 둘러싼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움직임 역시 의미심장하다.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은 미국의 정보기관이 전 세계 인사들의 개인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왔음을 폭로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의 국가안보국(NSA)과 중앙정보국(CIA)에서 시스템 관리자로 일했던 스노든은 미 정부가 시민들을 무작위로 감청해 왔으며, 구글이나 애플 같은 인터넷 기업들의 협조를 얻어 각국 정상을 비롯한 전 세계 인사들의 통화기록, 사진, 이메일, 카드사용 내역, 로그인 기록, 인터넷 접속 위치 등을 광범위하게 축적하고 일부를 상부에 보고해 왔다고 폭로했다.

<로봇, 소리>는 스파이 위성의 존재를 통해, 미국의 정보기관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무차별적으로 정보를 수집·축적하고 있는 감시사회의 실태를 보여준다. 영화는 스노든의 폭로나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기획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몇 년의 시간차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대구 지하철 참사 후 10년이라는 세월이 무상하게 그려져 있고, 2003년에 시작된 미국의 대중동 전쟁은 2013년에도, 2016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2013년 스노든의 폭로나 2014년 세월호 참사 이전이라고 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달랐던 것이 아니다. 감독은 영면하게 감시사회와 위험사회의 공기를 포착하여 영화를 기획하였고, 너무도 확연한 실체를 가진 비유로 지금 우리의 눈앞에 도달한 것이다.



◆ 보호는 좋은 것입니까?

영화 <로봇, 소리>에는 간간이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이 있다. 가령 “전원을 뽑아버리겠다”는 김해관의 협박에 로봇은 “번호를 말씀하세요.”라고 경쾌하게 말한다. 또한 “애인의 통화기록을 알려줄까요?”라는 자신의 제안에 연구원(이하늬)이 “아니”라고 답하자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가진 인공지능 로봇이 자기보존의 본능만이 아니라, 폭격을 당한 소녀에게 죄책감을 느끼거나 개인정보를 타인에게 알리는 것이 비윤리적인 행위임을 알고 심적 부담을 느낀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로봇은 자기보존의 본능만큼이나 윤리적 판단능력과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 역시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보존의 본능뿐만 아니라, 정보의 수집과 사용에 대한 윤리적 감각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임무를 위한 행위로 불행한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책임감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인공지능보다 낫다고 자부하는 인간의 뇌를 지닌 존재의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영화 속 국정원 직원이나 현실의 수많은 조직원들은 그러한 능력과 감각을 망실한 듯 보인다.



영화에서 계속 반복되는 질문은 “보호는 좋은 것입니까?”이다. 김해관은 딸을 ‘보호’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보호’는 억압이었다. 이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국정원이나 국가안보국이 존재하는 명분은 국민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보호’는 억압이다. 영화는 모든 ‘보호’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딸의 마지막 말이나, ‘소리’의 마지막 말은 ‘보호해주어서 고맙다’는 것이다.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최소한의 ‘보호’를 넘어서는 ‘보호’는 감시와 억압일 수밖에 없다.

집회하는 시민에게 물대포를 직사하여 사경을 헤매게 한 경찰은 누구를 ‘보호’한 것일까. 자신의 임무수행으로 죽어가는 피해자가 생겼을 때, 책임감이나 사과하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경찰은 로봇일까 사람일까.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로봇, 소리>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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