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하는대로’, 설 명절 파일럿 예능 중 최고로 꼽는 이유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예능 프로그램의 성패를 나누는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방송사 쪽에서는 시청률 몇 퍼센트라는 숫자가 최대 관건이겠으나 내 나름의 기준은 방송이 끝난 뒤 시청자와 제작진, 출연진 모두가 찜찜한 구석 없이 훈훈함을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라고 본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출연자의 보석 같은 면면이 눈에 들어오고, 그래서 무엇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지고, 친해지고 싶고, 시간 관계 상 잘려나갔을 순간순간이 상상이 되고, 그들이 경험한 일들을 나도 따라하고 싶고, 더 나아가 기억에 남는 대사 몇 마디가 있다면 그것이 괜찮은 예능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설 명절 파일럿 프로그램 중 발군은 MBC <톡하는대로>였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면 양념처럼 따라 붙는 갈등 따위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물 흐르듯이 편안하면서도 알찬 시간이었으니까. 특히 파일럿이니만큼 짧은 시간에 많은 걸 담아내야 하는 부담이 적지 아니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과욕을 부리지 않고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하게 출연자의 여정을 따라가 준 제작진의 넉넉한 품새에 박수를 보낸다.

네티즌의 실시간 SNS 댓글대로 움직이는 일명 '아바타 로드 버라이어티'에 참여한 서로 다른 조합의 세 팀. 연기자 윤계상과 권율은 일찍이 O'live <윤계상의 원테이블>을 통해 궁합이 검증된 팀이었고 MC그리, 신동우, 노태엽으로 이뤄진 예비 고3 팀도 투니버스 <막이래쇼>로 다져진 우정이 기반이기에 별 걱정이 없었다. 물음표는 개그맨 유세윤과 피에스타 멤버 차오루 팀이었는데 주로 격의 없는 이들과 거침없는 화법으로 방송을 해온 유세윤이 낯선 걸그룹 멤버, 그것도 외국인 여성과 어떤 그림을 그려낼지 궁금증이 일기는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위 조절에 실패해 괜한 구설수에 휘말리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으나 시쳇말로 ‘웬열!’. 지금 눈에 선한 건 함께 하면 덜 추울 것 같다며 유세윤의 뒤를 이어 차디찬 겨울 바다로 뛰어들던 차오루의 건강하고 맑은 웃음이고 귀에 쟁쟁한 건 “책임은 그들에게, 감동은 우리에게.”라고 한 마디로 정의하던 유세윤의 진지한 음성이다. 서른세 번째 댓글의 명에 의해 떠밀리듯이 택한 입수였지만 그 나름대로 겨울 바다가 주는 차가운 감동이 있었다는 그. 수년간 가슴 속에 쌓아둔 묵은 감정들이 동해 바닷물에, 바닷바람에 말끔히 씻겨 나갔으리라.



그런가하면 ‘톰과 제리’의 제리처럼 윤계상을 몰아댔지만 선을 넘는 법이 없어서 귀여웠던 권율과 내내 당하면서도 내내 웃어주던 윤계상의 속 깊은 배려는 또 어찌 잊으리오. 아울러 한 가지, 늘 아버지 김구라의 부록처럼 등장해 지적을 받아온 MC그리 동현이가 MBC <위대한 유산>에 이어 이번 <톡하는대로>로 홀로서기에 성공했지 싶어 반가웠다. 물론 여행을 떠나기 전 어김없이 아버지의 모습이 보여 유감이긴 했어도 또래들과 어우러질 때가 훨씬 자연스럽고 보여줄 게 많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만으로 그에겐 큰 소득이 아닐는지. 출연자들이 이처럼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가지를 얻었다면 시청자는 뭘 얻었을까?

듣자니 무작정 떠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이 궁리 저 궁리 해가면서 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차근차근 계획대로 밟아가는 여행이 아니라 그냥 발길 가는 대로 타고 걷고, 형편 닿는 대로 먹고 마시고, 뜻밖의 누군가를 만나고, 난국을 해결해나가는, 그런 롤플레잉 게임과도 같은 무한 변수의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얘기다. 나는 언제쯤이면 떠날 수 있을까? 달력을 뒤적거린다면 이미 무작정 떠나기가 아니지 않나. 게다가 내겐 여정에 적극 동참해줄 팔로워도 별로 없으니, 어째 또 부러워만 하다 말 것 같다.

칼럼니스트 정석희 soyow59@daum.net.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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