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일기’, ‘위대한 유산’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풍성한 차례상처럼 다양하고 푸짐하게 차려내는 예능 보따리는 명절의 신풍속도로 자리 잡았다. 이번 설 연휴에도 아이돌을 활용한 쇼와 이제는 굳건한 예능 장르로 정착한 가창 경연의 메아리가 이어졌고, 그 한켠에서 ‘파일럿’이란 본분에 맞는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이번 설 연휴 특집예능 중 가장 눈길을 끌며 뜨거운 찬사를 받은 프로그램은 MBC 파일럿 <미래일기>였다. 관찰형예능에 시간여행을 결부한 특색 있는 기획은 따뜻한 웃음 속에 추구하는 의미와 가치를 손실 없이 전하며 시청률 8%대에 육박하는 좋은 반응과 가능성을 보았다.

‘올드맨 분장을 통한 시간여행’을 골자로 한 이 파일럿 프로그램은 기존의 일상을 탐구하는 관찰형 예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지금 자신이 누리거나 숨 쉬고 있는 모든 것에서 스스로를 한 발짝 격리시킨다. 나이키 사에서 세계 최고의 인기 축구 스타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노숙인으로 분장시켜 마드리드 시내에 홀로 던져놓고 사람들의 극과극의 반응을 본다든지, NBA 농구 선수 카이리 어빙이 할아버지로 분장해 동네 농구장을 휘젓는 펩시 사의 엉클 드류 시리즈처럼 지위, 인기, 인지도, 부, 건강, 가족 등 현재 존재하고 누리는 것에서 떨어진 채 자기 자신과 마주한다. 일종의 가상현실과도 같은 거울 앞에 선 출연자들은 한순간에 늙어버린 외모에 맞춰 진지하게 몰입하면서 시청자들 또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분장이든 진지함이든, 잘못했으면 어색함을 극복하지 못했을 설정이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단번에 빠져들었던 이유는 예능에서도 판타지스타로 거듭난 안정환의 존재 덕분이다. 축구선수로서 안정환은 외모만큼 우아한 테크니션이었지만 예능에서는 겉은 무뚝뚝하며 귀찮은 게 많고 늘 투덜거리며 농칠 거리를 찾는 아저씨다. 그런 속에 깃든 따뜻한 마음과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인간적인 매력은, 좋은 사람, 좋은 어른의 기운으로 이번에도 시청자들을 끌어당겼다.



그는 축구장에서 만난 초등학생의 말대로 보통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분장한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안정환은,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닌 거 같다’며 혼잣말로 투덜거리다가 ‘이러고 다니니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며 이내 진지하게 몰입한다. 길에서 넉살좋게 할아버지 흉내를 내고, 외모에 맞게 행동은 느려지고 말이 점점 없어지는 데 신기해한다. ‘독거’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가족을 떠올리고, 자신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80세가 되면 이렇게 생활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상상에 충격을 받는다.

진지해진 안정환을 따라가며 시간여행에 동참한 시청자들은 할아버지 분장을 한 남편을 보고 눈물을 터트리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현실적인 미래를 마주하고 한참 말을 잃는 강성연을 만나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삼대가 힙합으로 화합하는 제시의 집에서 어머니와 가족으로 생각이 넓어지면서 감정의 폭도 확장된다.

강성연이 이동 중 어쩌다 보게 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걱정하지 마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걱정하라’는 문구는 이 프로그램의 캐치프레이즈가 됐다. 시간을 건너뛰면서 현재 너무도 당연했던 공기와 같은 환경들이 어떻게 변하게(잃게) 될지, 자신의 변화된(늙고, 잊혀지고, 힘없고, 미모를 잃은)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응해 가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찾는 여정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다. 제작진의 기획은 흥미로웠고, 출연진들은 진지했다.



그러나 완벽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극적인 설정이다보니 그냥 관찰하는 게 아니라 일정 부분 미션을 소화하는 식의 예능적 문법이 어중간하게 들어와 있다. 또한 파일럿에 쏟아진 반응에 대한 경계와 보정이 필요하다. 명절 연휴에는 전통적으로 휴머니즘과 가족 이야기를 다루는 콘텐츠들이 강세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난 추석에 큰 찬사를 받고 정규편성이 되자마자 모두가 떠나버린 <위대한 유산>이 좋은 예다.

명절 분위기 속에서 의미를 앞세워 통한 프로그램들, 특히 따스한 감정을 바탕으로 하는 예능은 일회성 특집으로 할 때와 정규 편성 되었을 때 노선을 달리해야 하는 고민이 있다. 감정의 소요를 일으키는 깜짝 설정에 내포된 감정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데, 매주 반복할 만한 지속가능성이 있는지, 계속 놀라움으로 다가올지, 이벤트 차원이 아니라 어떠한 설정으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해서 따스한 온기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이번 파일럿 만으로는 해결책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미래를 통해 지금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기획은 훌륭했고 즐겁게 잘 봤다. 하지만 그 앞에 반복되는 ‘감동’을 앞세웠다가 ‘유산’이 되었던 프로그램들을 충분히 검토해야 이 기획의 힘, 살아 돌아온 파일럿을 마주하는 반가움이 커질 것이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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