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만약 한국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면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캐롤>에는 화가 잔뜩 난 남자가 두 명 등장한다. 이해는 간다. 한쪽은 결혼까지 생각한 여자친구가 백화점에서 몇 번 만난 유부녀에게 반해 자길 걷어찼고, 다른 한쪽은 10년 동안 같이 산 아내와 이혼을 준비 중이다. 두 사람 모두 그 여자들이 자기에게 왜 그러는지 모르겠고 무엇보다 억울해죽겠다.

하지만 대부분 한국 관객들은 그들의 분노보다는 태도를 주목한다. 이들은 특별히 매력적이거나 호감가게 그려진 인물들은 아니다. 하지만 짜증나고 많이 위협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위협은 말과 제스처로 그친다. 수많은 관객들이 <캐롤>의 여러 장면에서 그 남자들이 폭력을 휘두를까봐 걱정했다고 고백한다. 그들은 만약 이 영화가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면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상상하고 공포에 질린다.

영화 속 배경인 1950년대 미국 남자들은 21세기 한국영화 속 남자들보다 더 비폭력적이고 문명적이었는가? 이건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무엇보다 <캐롤>의 원작자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자신부터가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가 곤경에 빠지는 남자들을 그린 소설을 전문으로 쓰는 작가이고 <캐롤>의 원작인 <소금의 값>은 살인이 나오지 않는 희귀한 하이스미스 장편이다. 물론 범죄물 속의 극단적인 폭력과 일반적인 영화 속의 일상화된 폭력은 또 다른 종류이긴 하다.

이 영화의 타이틀롤인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남편 하지(카일 챈들러)는 정말 지저분한 단계 직전까지 간다. 사립탐정을 시켜 아내를 미행할 정도라면 막장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캐롤은 이 상황을 최대한 문명화된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영화 후반에 나오는 “법정으로 가면 정말 추해질 거야. 하지만 하지, 우린 추한 사람들이 아니야”란 캐롤의 대사는 기초적인 인간적 품위에 대한 호소이다.



만약 이 영화가 한국을 배경으로 만들어진다면 같은 호소가 가능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이를 부정한다. 쉽게 부인할 수 없는 이유가 제시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천박한 나라에 사는 천박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히트한 <검사외전>이나 <내부자들>과 같은 영화들을 보라. 정의구현을 내세우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천박함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작품이다. 우리는 천박하지 않은 한국 사람들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우리가 사실적이고 솔직하게 한국 사회를 그릴 수 있는 길은 최대한 천박해지는 것뿐이다. 그러니 김치로 남의 따귀를 때리는 일 같은 것들이 당연시된다.

냉소와 비관주의는 손쉽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아무리 우리가 천박한 나라에 산다고 해도 여기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오로지 천박하기만 한 사람들만 사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가로서 그런 사람들만 나오는 이야기를 만드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예술가들이 그런 사람들에만 집중한다면 그건 뭔가 이상하다. 게다가 아무리 사실성을 추구하고 실제 세계에 모델이 있다고 해도 허구의 이야기는 결국 평행우주의 가상현실에서 벌어진다. 그런데도 굳이 현실의 천박함에 인질로 잡혀야 할까? 그건 솔직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은 세상을 바꾸는 상상력과 연결된다. 모두가 좁아 터진 상상력 안에서 천박한 솔직함에만 집중한다면 과연 세상이 바뀔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캐롤>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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