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낭비 아닌 연기력 낭비형 배우 전인화에 대해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배우 전인화의 대표작은 여전히 1980년대 사극 MBC <조선왕조500년-인현왕후>의 장희빈과 2천 년대 초반 방송된 SBS 사극 <여인천하>의 문정왕후다. 물론 그 후 그녀의 커리어가 멈춘 것은 아니다. 작년만 해도 전인화는 두 편의 주말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삼십 퍼센트를 훌쩍 넘는 시청률을 거두었다. 그 중 한편인 MBC 주말드라마 <내 딸 금사월>에서 전인화는 여주인공 신득예를 여전히 훌륭하게 소화해 낸다.

잠깐,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금사월(백진희), 혹은 주인공 자리 뺏어먹기가 특기인 김순옥 드라마 특유의 악녀 오혜상(박세영) 아니냐고. 아쉽지만 <내 딸 금사월>의 젊은 여성 인물들은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팔푼이 아닌 금사월의 친엄마 신득예에 스포트라이트를 뺏긴 지 오래다. 하지만 팔푼이만 아닐 뿐 가발 쓰고 안경 쓴 1인2역 헤더신으로 홀랑 변신하는 신득예도 그다지 설득력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드라마가 절정에 치달을수록 득예 또한 갈등을 위한 요란한 꼭두각시로 휘둘리는 중이다.

허나 전인화의 매력은 이 설득력 없는 인물을 설득력 있게 각인시키는 힘에 있다. 그것도 그 캐릭터를 과장되게 그려서가 아니라 지극히 냉정하고 절도 있게 연기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사실 <내 딸 금사월>이나 <전설의 마녀>, <백년의 유산> 등과 같은 드라마에서 전인화의 역할은 그런 부분에 있다. 박원숙이나 김수미가 호들갑으로 드라마를 유쾌하게 만든다면 전인화는 지극히 냉정하고 절도 있는 연기로 극에 긴장감과 사실감을 몰아넣는다.

이런 종류 주말극의 기본특성은 ‘말이 안 되는’ 사건 전개다. 어이없어 실실 웃으며 혀를 차며 보는 것이 이 시간대의 드라마다. 전인화의 장면에서는 그런 헛웃음이 멈추고 단박에 집중된다. 심지어 그 순간만은 이 주말드라마가 꽤나 심도 깊은 작품인 것처럼 여겨지는 착각까지 불러온다. 물론 그렇게 받아들이기엔 <내 딸 금사월>은 이제 너무 멀리 간 감이 있긴 하지만.



하여간에 전인화는 MSG 가득한 주말드라마에서도 송로버섯 같은 풍미를 남기는 배우다. 하지만 주말극에서 낭비 되는 배우 전인화의 연기력이 아까운 건 사실이다. 전인화는 다른 한국 여배우들과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감정의 진폭, 여성인물들의 흐느끼고, 울부짖는 장면들이 많은 한국 드라마에서 전인화의 연기는 이질적이다. 그녀는 인물의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표정이나 분위기를 통해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가볍고 발랄한 로맨스의 장면보다 진지하고 매서운 분위기기의 장면에서 전인화의 연기가 특히 빛을 발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SBS <여인천하>에서 난정이 강수연의 강한 눈빛과 경빈 도지원의 희대의 유행어 사이에서도 문정왕후 전인화가 밀리지 않았던 건 그런 이유에서다. <여인천하> 내내 문정왕후는 진지함과 매서움을 고요한 표정 아래 감춘 채 이 작품을 힘 있게 움켜쥐고 놓치지 않는다.

전인화가 보여주는 이런 타입의 연기나 분위기는 한국 드라마에서 사극을 제외하면 그다지 설 만한 자리가 많지 않다. 비슷한 또래의 배우 김희애가 연극적이고 과장된 톤의 연기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면서도 주인공의 자리를 꿰차는 건 그런 극적인 분위기의 카타르시스를 한국 드라마가 여전히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배우 전인화에게 다른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내 딸 금사월> 황당한 장면 중 베스트에 손꼽을 만한 43회의 마지막 장면을 돌이켜 보자. 강만후(손창민)가 이홍도(송하윤)를 떨어뜨린 2층 공사장에서 신득예와 강만후는 재회한다. 홍도가 떨어졌던 곳은 이미 벽으로 막혀 있다. 강만후는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용서를 빈다. 저승사자가 앞에 선 욕심 많은 부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신득예는 강만후를 힘껏 밀치고 이때 벽돌은 와르르 무너진다. 낭떠러지 앞에 선 강만후와 그의 멱살을 잡고 신득예는 냉정하게 하지만 서서히 감정을 끌어올리며 분노를 터뜨린다.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의외로 힘 있게 다가온다. 빤하디 빤한 주말드라마에서 장르물의 히어로 분위기를 그럴싸하게 풍기다니. 그것도 오십대 여배우가 순식간에 터미네이터 T1000같은 매력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아무래도 이 여배우에게 진정 어울리는 옷은 흔하디흔한 멜로나 로맨틱코미디, 주말드라마가 아닌 추리물이나 SF같은 장르물인가 보다. 우아하고 부유한 상류층 귀부인이지만 알고 보면 재벌가에서 벌어진 음흉한 미제사건들을 모두 꿰고 있는 탐정. 아니면 의뢰 받은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아름답고 냉정한 사이보그 여인 같은 그런 역할 말이다. 어째 농담처럼 쓰고 있긴 하지만 그냥 농담만은 아니다. 이 여배우에게는 그런 분위기의 매력을 발산할 만한 특별한 힘이 분명 숨어 있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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