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다섯’, 김수현의 ‘그래, 그런거야’보다 재미있는 이유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KBS 새 주말드라마 <아이가 다섯>은 학부모 참관수업에서 초등학생 이수(조현도)가 발표하는 엄마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수가 쓴 글 속에서 엄마는 설거지도 제때제때 안 하고 할 줄 아는 요리는 계란밥이 전부다. 아침식사는 홍시, 그도 아니면 식빵이나 우유 한 잔이 끝이다. 물론 식빵과 우유가 함께 나오는 적도 거의 없다. 거기에 집안 꼴은 말 그대로 소파와 바닥 모두 발 디딜 틈 없이 너저분하다.

여기서 잠시,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김수현 작가의 신작 주말드라마 SBS <그래, 그런거야>의 첫 회로 넘어가 보자. 이 드라마의 시작은 늙은 시부모를 모시는 막내며느리 한혜경(김해숙)의 일상이다. 그녀는 정말 열심히 일 한다. 싹싹 쓸고 닦고, 식사 준비도 정성 가득에, 조미료 양념은 물론 가족들 입맛 하나하나까지 깐깐하게 신경 쓴다. 문영남 작가 드라마에서 늘 성난 코뿔소로 변하는 중견여배우 김해숙은 김수현 드라마에서는 대개 밭가는 황소 같은 캐릭터로 등장한다. 물론 럭셔리한 집안이기에 진주목걸이 하나쯤 목에 걸 수 있는 황소.

두 드라마의 엄마는 정말 대조적이지만 이상하게 좀 더 정감 가고 현실적인 집구석은 <아이가 다섯>의 그 너저분한 쪽이다. 물론 <아이가 다섯>에서 이수의 엄마는 금방 여자가 아닌 남자로 밝혀진다. 엄마가 알고 보니 여장남자에 입양아를 기르는 설정이 보수적인 주말극에 나올 리야 없고, 부인과 사별한 주인공 이상태(안재욱)가 아이 둘을 기르며 엄마 역할까지 맡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KBS <아이가 다섯>은 그 제목처럼 듣자마자 옆구리가 결려오고 숨이 턱 막히는 주말극은 아니다. 제목만 희망찬 <파랑새의 집>이나 눈물샘을 자극 당하는 것조차 짜증났던 <부탁해요, 엄마>처럼 축축 처지는 가족극이 아닌 오랜만에 등장한 발랄하고 코믹한 작품이다.

<아이가 다섯>이 취하고 있는 유쾌한 가족극의 원형을 따져 보면 실은 1991년 MBC의 주말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형편이 다른 사돈끼리의 신경전, 대조적인 성격의 남녀, 톡톡 튀는 대사와 가끔 허를 찌르는 유머까지. <사랑이 뭐길래>는 김수현 작가의 대표작이자 그녀의 유머감각에 한 여름 풋사과 같은 맛이 남아 있던 시절의 작품이다.

하지만 최근작들에서 노작가의 유머감각은 겨울의 밀감 같은 맛이 난다. 어떤 때는 제법 달다 싶고 몸에 좋은 비타민 같지만 잘못 고르면 좀 시거나 떫다. SBS <그래, 그런거야>는 떫기보다 밍밍할 때가 많다. 팔십 년대에나 통했을 법한 늙은 아들들의 썰렁한 농담에는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솔직히 어디서 웃어야할지 모르겠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 늘 등장하는 철이 없지만 말투는 구식인 젊은 세대들 또한 이제는 피곤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 다다다다 수다스러운 말투가 구식이 아니었던 시절도 있었다. 아마 1970년대나 198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에서 말 빨리하기 시합 같은 것까지 있었던 것 같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들 말이 그리 길지 않다. “너 눈을 왜 그렇게 뜨니?”처럼 요점만 짧고 간단하게. 아니면 “아니, 아니”처럼 혀 짧은 소리 밑에 진짜 속내는 감춰두거나.

KBS <아이가 다섯>의 장점은 바로 가족극의 설정 안에서 보여주는 현실감에 있다. <로맨스가 필요해>나 <연애의 발견>을 통해 젊은 세대 연애사를 생생하게 포착한 작가답게 여주인공 안미정(소유진)과 주변 인물들의 대사나 사고방식은 꽤나 현실적이다. 말은 빨라도 반복은 없었다. 싸가지 없는 캐릭터들도 말꼬리 잡는 대신 상대방의 약점만 쿡 찌르고 달아난다.

“국영수 달달 외우면 뭐하니. 감정지수가 높아야지.” (<아이가 다섯>, 못된 시누이 장진주)
무엇보다 이 드라마의 젊은이들은 철없어도 한꺼풀 벗겨보면 예의 바른 캐릭터들이 아니다. 언젠가부터 김수현 드라마의 젊은이들은 겉보기엔 철없어도 속내는 착하고 사랑스러운 인형들로 변한 지 오래다. 그 청년이 다 그 청년 같고, 그 아가씨가 다 그 아가씨다.

하지만 <아이가 다섯>의 젊은 인물들은 대부분 대놓고 속물적이지만 납득은 간다. 여주인공 안미정은 현재 친구와 바람난 남편과 이혼한 상태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을 해외에 발령받는 상태로 설계해 놓는다. 남편을 못 잊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아직 어린 세 아이와 가족을 돌봐주는 늙은 할머니를 걱정해서다. 아니면 일상을 이루는 블록 중 하나만 빠져도 그들이 쌓아온 현실의 행복이 와르르 무너지는 걸 체험한 세대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거짓말이 최선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엔 급한 불을 꺼주는 대출금의 역할은 한다는 걸 잘 안다. 물론 거짓말은 대부분 들통이 나기 마련이고 거짓말에는 망신살이라는 이자가 붙는다. <아이가 다섯>은 그 거짓말 이후의 난리법석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더구나 인간의 삶이란 본디 백 퍼센트의 진실 아닌 90퍼센트의 들통 나는 거짓말과 9퍼센트의 숨겨진 거짓말, 그리고 1퍼센트의 진실로 이뤄져 있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런데 그 1퍼센트의 정확한 진실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이다. 나를 낳아준 부모도 죽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죽고, 나 역시 죽는다. 김수현 작가의 <그래, 그런거야>는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무겁고도 진실한 울림이 있다. 이 드라마의 중심인물인 노부부를 비롯해 많은 인물들은 자꾸만 죽음을 읊조린다.



어쩌면 이 드라마는 예상과 달리 <무자식 상팔자>처럼 유쾌한 가족극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수많은 농담들은 양념일 뿐 작가가 진짜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는 죽음 그 자체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것도 임성한 작가의 <오로라 공주>식의 허무한 데스노트 죽음이나 눈물샘을 자극하려 애쓰는 <부탁해요, 엄마> 식의 최루성 죽음이 아닌 정말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진실, 죽음에 대해. 그리고 수많은 타인의 죽음을 품에 안고 묵묵히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친구가 (병으로 세상을)떠난다는데 이 아침에 나는 내 인생을 생각한다.” (<그래, 그런거야> 막내며느리 한혜경)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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