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백우진의 글쓰기 전략] 조선 중기 인물 허균(1569~1618)은 “글쓰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 수천 마디의 말을 붓만 들면 써내려갔다”고 《광해군일기》에 전한다.

허균은 유교적인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영위했으며 그런 스타일을 글에서도 드러냈다. 그는 “문장이란 각기 고유한 맛이 있는 것”이라며 자신의 문체에 대해 “나는 내 시가 당시와 송시와 비슷해지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남들이 ‘허균의 시’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친한 벗에게 쓴 다음 편지에서 우리는 인간 허균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그는 정중하면서도 재기 발랄하고 아취를 연출하면서도 익살이 있다. 둘 다 술자리를 마련해놓고 벗을 부르는 편지다.

짧은 글이지만 읽으면서 조선의 문장가 허균의 글쓰기를 배워보자.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떻게 구성해 펼쳐놓았는지에 생각해보자.


<그리운 벗 권필에게>

형이 강화도에 계실 때에는 1년에 두어 차례 서울에 오시면 곧 저희 집에 머무르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주고받았는데, 이는 인간 세상에 매우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오시고는 열흘도 한가롭게 어울린 적이 없어서 멀리 강화도에 계시던 때보다도 못하니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못의 물결은 바야흐로 넘치고 버드나무 그늘은 한창 짙습니다. 연꽃은 벌써 붉은 꽃잎을 반쯤 토해냈고, 푸른 나무는 비취빛 일산 속에 은은히 비칩니다.

때마침 우유술을 빚어서 젖빛처럼 하얀 술이 술동이에 뚝뚝 떨어지니, 얼른 오셔서 맛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바람 잘 드는 마루를 하마 쓸어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 허균 산문집 《누추한 내 방》 中


<술 한잔 하러 오시게>

처마엔 빗물 쓸쓸히 떨어지고, 향로엔 가느다랗게 향기 풍기는데, 지금 친구 두엇과 함께 소매 걷고 맨발로 방석에 기대앉아서 하얀 연꽃 옆에서 참외를 쪼개 먹으며 번우한 생각들을 씻고 있네.

이런 때 우리 여인(허균의 지우 이재영의 자)이 없어서는 안 될 테지. 자네 집 사자 같은 늙은 아내가 반드시 고함을 지르면서 자네 얼굴을 고양이 면상으로 만들 테지만, 늙었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움츠러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종놈에게 우산을 가지고 대기하도록 해 놓았으니 가랑비쯤이야 족히 피할 수 있으리. 빨리빨리 오시게나. 모이고 흩어짐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런 모임이 어찌 자주 있겠는가. 흩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있겠는가.

- 허균 산문집 《누추한 내 방》 中


권필에게 쓴 편지는 ‘기승전결’로 전개된다. 권필과의 지난 교분을 떠올리며 최근 소원해진 데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뒤 장면을 바꿔 자신이 있는 곳의 정경을 그려보인다. 이 정경 위에 술자리로 오라는 초청을 띄운다.

이재영에게 보낸 편지는 정경을 앞세웠다. 권필에게 쓴 것과 순서가 다르다. 이재영에게 띄운 편지를 기승전결의 순서에 따라 문단을 다시 구성하고 문장을 추가하면 어떨까. 나는 다음과 같이 수정했다. 문장도 군데군데 손질했다.


<술 한잔 하러 오시게>

처마엔 빗물 쓸쓸히 떨어지고 향로엔 가느다랗게 향기 풍기네. 지금 나는 친구 두엇과 함께 소매 걷고 맨발로 방석에 기대앉아, 하얀 연꽃 옆에서 참외를 쪼개 먹으며 번우한 생각들을 씻고 있네.

이런 때 우리 여인(허균의 지우 이재영의 자)이 없어서는 안 될 테지. 갑작스런 초청이네만, 사람이 정해진 대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좋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가 흔한 것도 아니지.

자네 집 사자 같은 늙은 아내가 분명 고함을 지르면서 자네 얼굴을 고양이 면상으로 만들려고 하겠지. 그러나 늙었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움츠러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암, 그렇고 말고.

이런 모임이 어찌 자주 있겠는가. 이 자리가 파한 뒤에는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해서 돌이킬 수 있겠는가. 종놈에게 우산을 가지고 대기하도록 해 놓았으니 가랑비쯤이야 족히 피할 수 있으리. 빨리빨리 오시게나.


권필에게 보낸 편지를 정경을 앞세워 다음과 같이 다시 써봤다. 구성이 어떻게 달라졌고 각 문단이 새로운 얼개 속에서 서로 호응하도록 하기 위해 어떤 문구를 추가됐는지에 주안점을 두고 읽어보자.


<그리운 벗 권필에게>

못의 물결은 바야흐로 넘치고 버드나무 그늘은 한창 짙습니다. 연꽃은 벌써 붉은 꽃잎을 반쯤 토해냈고, 푸른 나무는 비취빛 일산 속에 은은히 비칩니다. 이렇게 좋은 계절에 이런 정취 있는 자리에 홀로 앉아 있으니 형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형이 강화도에 계실 때에는 1년에 두어 차례 서울에 오시면 곧 저희 집에 머무르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주고받곤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 세상에 매우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오시고는 열흘도 한가롭게 어울린 적이 없습니다. 가까이로 오신 이후 형과 저의 교유가 멀리 강화도에 계시던 때보다도 못하니, 이는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오랜만에 형을 뵙고자 짧은 서한을 보냅니다. 이렇게 좋은 날을 두고 어느 다른 날에 형과 함께 지내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초청입니다만, 만나고 헤어짐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 긴한 일이 있지 않다면 이리로 건너오시죠.

때마침 우유술을 빚어서 젖빛처럼 하얀 술이 술동이에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얼른 오셔서 맛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바람 잘 드는 마루를 하마 쓸어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위원> smitten@naver.com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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