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기다리며’ 심은경·김성오 열연이 아까운 개운치 않은 뒷맛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널 기다리며>는 심은경이 주연을 맡은 스릴러로, 김성오의 감량 투혼이 화제가 된 영화이다. <아저씨><신세계><내부자들>의 제작진들이 미술감독과 무술감독을 맡아 기대를 모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의 만듦새는 몹시 실망스럽다.

심은경은 순진한 소녀와 기괴한 살의를 품은 괴물을 오가며, 원톱으로 극을 무난히 끌고 간다. 하지만 새로울 건 없다. 심은경은 원래 검증된 연기자로, 특별히 연기변신이라 할 게 없다. 그는 이미 <불신지옥>에서 기괴한 캐릭터를 연기한 바 있고, <수상한 그녀>에서 극한의 이중성을 오가는 원톱 연기를 선보인 바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심은경이 빈틈 많은 시나리오 안에서도 나름 캐릭터를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는 흔적만은 여실하다. 김성오의 살빼기 투혼도 놀랍긴 하지만,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구성하거나 영화의 설득력을 높이는 것과 무관한 일이기에 허무하게 느껴진다. 영화의 장면 장면은 그리 나쁘지 않지만, 다 보고 나면 굉장히 아리송한 느낌이 든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애초에 복수의 설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스릴러라는 장르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 참으로 이상한 복수

연쇄살인범을 쫓던 형사 아버지가 어린 희주(심은경)의 눈앞에서 살해당했다. 이후 살인범 기범(김성오)은 체포되어 7건의 살인혐의로 기소되었지만, 한건의 살인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받아 15년 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니까 기범은 처벌을 받았지만, 내 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해서는 처벌받지 않았다. 희주는 이후 15년간 경찰서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복수의 칼을 간다. 그는 복수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자신만의 교양수업을 한다. 니체를 읽고 바그너를 듣는다.

마침내 기범이 출소하였다. 희주가 기범에게 다가가 복수를 하려는데, 그의 주변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기범을 의심하지만, 희주는 안다. 기범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기범에게 살인죄를 덮어씌우기 위한 누군가의 행위이다. 희주는 자신도 그와 비슷한 살인을 계획 중이기 때문에 흠칫 놀란다. 누군가 있다. 그래서 그는 과거사건의 기사를 보다가 ‘찌르기를 좋아하는 놈’과 ‘베기를 좋아하는 놈’이 따로 있음을 알아낸다. 희주는 그 사이 자신이 점 찍어 놓은 ‘인간쓰레기’를 죽여 기범의 살인으로 위장하는 짓을 하였다. 그리고 기범이 아닌 또 다른 살인자 민수를 찾아내 죽여서 기범 옆에 눕히고, 기범의 죄로 위장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범이 달아나자, 이제 자신이 기범 앞에서 자살함으로써 그를 살인자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기범은 15년간 옥살이를 했지만, 내 아버지를 죽인 죄 값은 받지 않았다는 것이 희주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진실에 관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복수는 진실을 밝혀서 정확히 내 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한 죄 값을 치르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추가적인 증거를 찾거나 자백을 받아내어 재심청구를 받는 것 말이다. 하지만 희주는 이미 사법부의 무능을 맛 본 사람이다. 그딴 법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느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적복수를 행하기 위해, 15년간 스스로 괴물이 되는 정신수련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희주는 굳이 기범을 살인범으로 만들어 법정에 세우는 방식으로 복수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는 사법부의 권능과는 무관하게 기범을 처단할 물리력과 스스로의 도덕적 논리를 갖고 있다. 희주는 이미 민수를 죽여서, 그의 시체를 처리하여 기범 옆에 끌고 와, 기범을 제압한 뒤 도망칠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희주가 그때 마음만 먹었더라면 기범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희주는 굳이 기범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인자로 처벌받도록 하기 위해 행동하였고, 그 결과 무고한 두 사람이 추가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 진실규명이 아니라면, 사법적 절차가 무슨 소용인가?

그가 행한 죄에 대하여 정당한 죄 값을 받지 않은 것에 분개하여, 그가 저지르지 않은 죄를 덮어 씌워 살인죄를 받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복수의 설계인가? 그것은 진실, 정의, 법 어느 것의 논리와도 맞지 않는다. 정의의 가치를 믿고 사법부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희주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어야 한다. 경찰도 밝히지 못한 ‘찌르기를 좋아하는 놈’과 ‘베기를 좋아하는 놈’을 구분해 냈다면, 둘이 그동안의 어떻게 살인을 나누어 했는지를 추적하거나 이를 경찰에 제보했어야 옳다. 그랬더라면 그동안 경찰이 알지 못했던 기범의 다른 살인 6건에 대해서도 밝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희주는 진실 규명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오로지 다른 살인을 기범에게 덮어 씌워 기범을 재판정에 세우는 것에 급급하였다. 어차피 진실과 무관하게 치러지는 재판이라면, 그것이 왜 필요할까. 기범에게 더 큰 고통을 가하는 것도 아니고, 사필귀정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죽하면 <세븐데이즈>에선 무죄로 풀려나게 한 뒤 더 고통스럽게 죽이는 복수를 행하지 않았던가) 희주가 진정으로 괴물이 되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면, 굳이 사법부의 힘을 빌리기 위해 복잡한 길을 갈 필요가 없다.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처벌하면 될 일이다. 더욱이 니체를 읽은 사람이 자살이라는 수동공격형의 방식으로 복수한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맞지 않는다.



영화는 마지막에 기범의 재판정에 희주가 건네준 분홍목도리를 메고 나타난 유족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희주를 죽인 기범의 재판정에 와서 눈물짓는다. 그들이 처음 기범의 재판정에서 느낀 울분은 진실이 규명되지 않은 것이었다. 기범의 두 번째 재판에서 그들이 느낀 것은 무엇일까. 사법부는 기범에게 7명의 살인(민수가 죽인 2명, 희주가 죽인 아저씨와 민수, 희주, 기범이 죽인 모텔 남녀)과 1명의 살인미수(신참형사) 혐의로 “사형!”을 선고한다. 어쨌든 살인이 선고되었으므로 유가족들은 후련할까.

그 7명의 살인 안에는 자신의 가족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자신의 가족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한 진실은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 애초에 희주가 분노했던 바로 그 지점이 해소되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사형” 밖에 답이 없는 사이코패스 살인자에 대한 증오와, 재발방지에도 실패한 무능한 사법당국에 대한 불신일 것이다. 대형사건의 피해자들이 한결같이 요구하는 것은 진상규명과 재발방지이지, 무조건적인 처벌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가 희주를 통해 이들에게 안긴 것은 ‘어쨌든 사형’이라는 투박한 처벌과, 살인범에 대한 증오와, 사법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다.

그러니 생각해보자. 희주의 잘못 설계된 복수로 인해 얼마나 피해가 큰지. 희주 자신은 물론이고, 희주가 죽인 동네 아저씨, 그로 인한 처의 자살, 희주가 기범을 놓침으로써 살해당한 모텔의 남녀. 또 다른 살인범 민수. 이렇게 6명이 목숨을 잃었다. 민수가 출소한 기범에게 살인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죽인 사람은 두 명이다. 누구를 죽여 기범을 살인자로 만든다는 생각을 품었다는 점에서 희주와 민수는 동급인데다, 희주의 죄상이 민수에 비해 결코 작지 않다. 희주의 복수극은 단지 무수한 죽음을 낳았다는 것 뿐 만아니라, 앞서 기범이 개입된 12건의 살인과 희주의 복수극 과정에서 죽은 6명의 죽음의 진상을 영원히 파묻어 버렸다. 그리고 살인자에 대한 실제보다 부풀려진 증오와 사법당국에 대한 불신을 남겼다.



◆ 신파에 치중하느라, 스릴러의 본질을 놓치다.

영화 <널 기다리며>는 복수자인 희주의 이중성과 묘한 슬픔의 정조에 집중하느라 정작 스릴러 본연의 임무를 방기한다. 영화는 연쇄살인범의 육체를 스펙터클로 소비해버릴 뿐, 온전한 캐릭터를 부여하지 않는다. 본래 연쇄살인범은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와 다른 개념이다. <살인의 추억>이나 <추격자> 등 많은 영화들이 보여주듯이, 연쇄살인범은 치밀한 설계와 기벽을 지닌 단순치 않은 존재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벽을 알아내기 위해 프로파일링이 강조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기범은 그저 살인의 쾌감을 즐기는 인물로 그려질 뿐, 연쇄살인범으로서의 다층적인 면모가 부각되지 않는다. 경찰들 역시 그를 연쇄살인범으로 지목할 뿐, 그의 살인에 대해 프로파일링을 동원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에게 씌워진 7건의 살인혐의 중 1건만 유죄로 인정된다. 7건의 살인에 대한 공통된 증거도 없는데다, 유일한 흔적인 시신의 상흔도 분석하지 않은 채, 경찰은 무엇을 근거로 그가 혼자서 7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확신했던 것일까. 왜 대영(윤제문)이나 희주는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이 기범이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가.



기범에게 유죄로 인정된 1건의 사건은 제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제보자의 신원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왜 당시 경찰은 제보자와 기범의 관계를 파악하려 들지 않았을까. 출소한 기범이 다시 살인할 것을 우려한 경찰이라면 가장 먼저 제보자를 보호했어야 한다. 그러나 경찰은 그리 하지 않는다. 영화는 대영의 입을 통해 “우리가 언제 앞 뒤 맞춰서 과학수사 했냐?”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실제 한국 경찰의 수준이 그렇다 할지라도, 사회 고발극이 아닌 스릴러를 표방하는 영화에서 경찰의 헛발질을 이토록 기본 없이 그리는 것은 너무 안이한 설정이 아닌가.

영화는 이 모든 질문을 뒤로 한 채, 희주의 죽음을 통한 슬픔의 정조와 조각난 잠언이 전하는 개똥철학을 여운으로 남기며 끝난다. 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널 기다리며>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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