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유혹’, 무한반복이 안타까운 중년 옴므파탈 드라마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MBC 50부작 월화드라마 <화려한 유혹>에서 여주인공 신은수(최강희)는 화려한 유혹과는 거리가 멀다. 은수는 베일에 싸인 인물의 지시에 따라 좌표 책자의 비밀과 남편의 죽음에 대한 실체를 찾기 위해 전 국무총리 강석현(정진영)의 집에 입주 가사도우미로 들어간다. 그리고 강석현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결국 그의 비서가 되고 아내가 된다.

뚜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아냐는 강석현의 질문에 드라마 <첫사랑>만 안다고 말하는 그녀는 그 소설을 읽어본 뒤에 총리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내 아들아,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해라. 그 황홀한 행복, 서서히 퍼지는 독을 두려워해라. 그 구절이 마음에 들어요.” (신은수)

은수는 화려하게 유혹하는 팜므파탈은 아니다. 그녀는 그저 누군가의 첫사랑, 그러니까 강석현의 첫사랑과 닮은 여인이거나 진형우(주상욱)의 첫사랑이다. 혹은 누군가, 그러니까 권수명(김창완)이 자신의 계략을 꾸미기 위해 이용한 여인일 따름이다. <화려한 유혹>에서 신은수는 여주인공이지만 남자의 마음 속 환상에 갇힌 캐릭터일 뿐 마음껏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드라마의 제목처럼 화려한 유혹에 어울리는 인물들은 중년의 옴므파탈들이다. 흥미롭게도 <화려한 유혹>은 남자들의 미묘한 심리전을 다룬다. 이들은 타인의 마음을 사거나 다른 이를 자신의 음모에 끌어들이기 위해 매력을 어필한다. 최근의 드라마에서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못된 남편, 어깨가 축 처진 가장, 직장에서 ‘개저씨’인 나이 든 남자들을 이렇게 흥미진진한 캐릭터로 그려낸 드라마는 사실 흔치 않다.



아마 그 중심에는 악역이지만 중후함과 로맨틱함을 잃지 않는 강석현이 있을 것이다. 은수가 강석현을 전략적으로 유혹하는 플롯일 터인데 <화려한 유혹>을 보면 어째 은수가 점점 강석현에게 빨려 들어가는 분위기로 흘러가곤 했다. 살짝 나왔을 법한 중년의 뱃살을 감춰주는 가디건을 입은 채 비빔밥을 묵묵히 먹는 모습, 심장이 안 좋아 가슴을 움켜잡으며 쓰러지거나 치매증상으로 버려진 짜장면을 쪼그려 앉아 먹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연민의 감정, “자네”라고 중후한 목소리로 부를 때에 안경 너머로 보이는 미묘한 눈빛 등등. 이처럼 배우 정진영의 매력이 더해진 강석현은 흔치 않은 중년의 옴므파탈로 재탄생했다.

한편 강석현이 느린 움직임의 수동형 옴므파탈이라면 진형우(주상욱)는 적극적인 능동형 옴므파탈이다. 국회의원인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으로 복수를 꿈꾸게 된 진형우는 자신의 계획을 위해 적극적으로 외모와 지략을 이용한다. 자신에게는 순정파인 진형우의 딸 강일주(차예련)를 상황에 따라 쥐고 흔드는 건 기본이다. 겉보기엔 막역한 친구지만 알고 보면 서로에 대한 반감의 골이 깊은 권력자들인 강석현과 권수명 사이를 오가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 하지만 이런 진형우는 정작 은수 앞에서는 옴므파탈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남자에게 첫사랑 은수는 서서히 퍼져나가는 독일 테니 어쩔 수 없다.



반면 드라마 막바지에 최대의 악으로 등장한 언론 권력인 권수명 또한 대단한 옴므파탈이다. 그의 유혹의 기술은 분위기나 미모가 아닌 철저한 거래와 슬그머니 모른 척하는 내숭이다. 이 의뭉스러운 남자의 덫에 수많은 이들이 걸려든다.

하지만 악의 중심 권수명도 어찌하지 못하는 인물이 <화려한 유혹>에는 등장한다. 아비는 언제나 아들 앞에 약자인 법. 권수명의 아들이자 강석현의 사위인 권무혁(김호진)은 막돼먹었으면서도 까탈스러운 옴므파탈 분위기로 아버지를 쥐고 흔든다.

“내가 너 소꿉장난하라고 그 집에 장가보낸 줄 아냐?” (권수명)

“그럼 간첩질하라고 장가 보내신 겁니까? 그게 아들한테 할 짓이에요?” (권무혁)

권무혁이 옴므파탈의 분위기를 풍기는 데는 인물의 캐릭터보다 이 캐릭터를 해석한 배우 김호진의 능력이 돋보인다. 쉽게 가면 막무가내 재벌2세로 보이기 딱 좋은 캐릭터를 김호진은 애정결핍에 위태로운 인격을 지닌 섬세한 인물로 가공한다. 최근에 그의 행보에서 가장 매력적인 연기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 시원한 복수극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화려한 유혹>은 지루한 반복이었을 수 있다. 한 회가 바뀔 때마다 인물들 간의 관계가 동료에서 적으로, 연인에서 원수였다 다시 연인으로 돌아가니 말이다. 허나 인물들 간의 밀고 당기는 심리게임의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는 매순간 파트너가 바뀌는 긴장감 있는 무도회 같은 작품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50부작은 좀 너무 길었다. 원래 유혹은 길면 길어질수록 그 매력은 반감되고 진이 빠지는 법. 더구나 매력적인 캐릭터에 비해 이야기의 흐름이 그리 흥미진진한 건 아니었다. 중간에 무한반복 뫼비우스의 흐름을 잘라내 50부작의 절반쯤으로 요리했다면 어쩌면 <화려한 유혹>은 지금보다는 시청자들을 더 화려하게 유혹했을지도 모르겠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