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규가 젊은 예능 ‘마리텔’을 접수할 수 있었던 이유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예능 대부 이경규가 젊은 예능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물을 만났다. 자신의 집에서 갓 태어난 강아지들과 함께한 ‘눕방’으로 1위를 거머쥔데 이어 이번엔 홀로 저수지를 찾아간 붕어 낚시로 1차 방어전에 성공했다. 스스로도 놀라는 눈치다. 근 30여 년간 방송 예능계의 정상에서 활약한 ‘기존 예능인’의 대표격인 이경규가 새로운 문화, 기술, 정서로 무장한 혁신적인 공중파 예능 <마리텔>과 환상의 짝꿍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 이전에 박명수, 정준하, 김영철 등 유명 예능인들이 오욕의 역사를 쓴 자리에서 나온 결과라 더욱 흥미롭다.

이경규가 ‘눕방’으로 <마리텔>을 접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한도전>에서 히트 친 예고 덕분도 있지만, 시청자들이 좋아할 만한 캐릭터로 변신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요즘 예능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일상성과 친근함이 통한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일상적으로 다가간 캐릭터를 극대화했다. 모두가 열심히 하려고 할 때 그는 모든 걸 놓았다. 김구라는 매주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하고, 조영구는 호들갑스런 응원단장 코스프레로 존재를 어필한다. 모두가 생존을 위해 콘텐츠의 신선함과 다양성을 찾아 발버둥 칠 때, 이경규는 편안함과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 피곤하면 눕고, 화가 나면 짜증을 낸다. 어려운 고비는 슬쩍 타협하며 넘어가려고 하고, 방송분량 안배 등의 방송을 위한 방송은 하지 않는다. 단, 절대로 오디오가 비도록 두지 않는다. 채팅이 급하지 않다면서, 채팅창에서 ‘짜증내는 거 봐라’ ‘헛방이구나’ 이런 멘트는 귀신같이 잡아낸다.

이경규가 <마리텔>의 젊은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건 이런 신선함이다. 그간 우리가 알던 이경규는 호통과 ‘욱’하는 성질과 불평으로 똘똘 뭉친, 예능선수들에겐 범접할 수 없는 선배이자 제작진도 대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방송국 복도를 지나가면 홍해를 가르듯 제작진, 특히 여성 작가들이 자신을 피한다는 씁쓸한 무용담을 스스로 말하곤 했다.



그러다 지난해 딸 예림이와 함께한 SBS 예능 <아빠를 부탁해> 이후, 소통과 일상의 공감이 주요 소재인 관찰형 예능 시대에 맞는 캐릭터로 변신했다. 한 편으로는 힘이 빠져 보이고, 한 편으론 여유를 갖게 된 어른의 모습이다. 그동안 주변에 호통을 치는 예능 대부의 면모가 부각됐다면, 이제는 헐렁하고, 친근하며, 평범한,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로 카메라를 돌렸다. 직장에서는 예능대부라 불리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냥 편하고 흔한 이웃 아저씨일 뿐인, 아빠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아무나 되는 건 아니다. 힙합식으로 말하면 ‘예능대부’에 대한 ‘리스펙’을 밑바탕으로 한다. 이경규의 변신에는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 권위를 내려놓고, 친근하게 다가올 때 갖게 되는 호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에 열심히 매진해서 성공한 사람에게 느끼는 멋과 같다. 시청자들 입장에서 오랫동안 정상급 방송인으로 봐왔던 이경규가 일상적이고 편안한 아저씨로 다가오니 재밌고, 친해지고 싶은 거다.



<아빠를 부탁해>부터 <마리텔>까지 이어지는 이경규의 최근 행보에서 그가 오랜 시간 최정상의 자리에 머물 수 있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캐릭터의 근간을 지키면서 세월의 요구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했다. 2000년대 중후반 리얼버라이어티에 밀려났던 이경규가 <남자의 자격>으로 리얼버라이어티에 도전해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이 그 예다. 물론, 해가 거듭될수록 리얼버라이어티의 성장 스토리를 지탱하기엔 체력적으로, 캐릭터 상으로, 혹은 체급 상으로 한계를 드러냈지만 시대적 흐름에 비교적 유연하게 몸을 실은 사례다. 이 점이 1990년대 2000년대 초중반까지 최고의 자리에 함께 있다 사라진 예능인들과 그의 차이다.

<마리텔>의 ‘눕방’은 이경규의 전성시대가 다시 한 번 열렸음을 천명하는 사건이었다. 그의 새로워진 캐릭터가 가진 호감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누구보다 짧은 녹화시간을 추구하던 그가 어느 날부터 카메라 밖의 모습과 일상적 행복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의 과거 명성 위에 얹히면서 소통의 진정성을 획득했다. 퉁명스럽게 때로는 멋쩍은 표정으로 “채팅이 급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라며 낚시채비에 열중하는 이경규 아저씨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기에 더 친해지고 싶고 더 기대하게 된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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