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할 것인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드라마 찬(贊)△. tvN 드라마 <기억>은 <시그널> 후속작으로, 기억과 망각을 둘러싼 진지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이성민을 비롯 박진희, 김지수, 전노민 등이 펼치는 노련한 연기와 치밀한 극본은 메시지를 유려하게 전달한다. <기억>은 기억과 망각을 의식과 무의식의 층위에서 다루면서 기억의 정치학을 말한다.

◆ 속물 변호사의 어두운 기억의 저편

여기 한 속물변호사가 있다. 박태석(이성민)은 변변한 배경도 없지만, 거대 로펌에 들어가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가 주로 하는 일은 재벌 등 VIP 의뢰인들이 벌여놓은 일들을 법정까지 가지 않고 조용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된다. 협박, 약점 캐기, 돈으로 막기 등등. 대학병원에서 잘못된 약물을 처방하여 환자가 사망했다며 내부고발자가 나서자, 박태석은 내부고발자를 만나 협박한다. 그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박태석이 협박으로, 그는 결국 자살한다.

바로 그날, 박태석은 자신도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쌤통이다. 잘난 박태석 제대로 벌 받았다” 그를 가장 아끼는 친구가 한 말이다. 박태석은 내부고발자가 죽기 전 무슨 암시처럼 내뱉은 “불행은 갑자기 찾아온다...준비할 시간도 없이...” 라는 말을 따라서 웅얼거린다. 하이에나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는 그 내부고발자는 앞으로 펼쳐질 박태석의 오페라에 일종의 서곡처럼 배치되어 있다.

요즘 들어 박태석은 자주 기억을 잊어버린다. 소지품을 잊고, 약속시간을 잊어버린다. 멍하니 길을 잃기도 한다. 술에 취해 집인 줄 알고 찾아간 곳, 그곳은 전처(박진희)의 집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15년 전 아들 동우가 뺑소니사고로 숨진 기일이었다. 박태석은 아들의 죽음을 의식에서 지우며 살았다. 재혼도 하고, 다시 아이를 낳아 기르며, 출세도 하고, 보란 듯이 잘 살고 있다. 그러나 박태석의 전처는 아들의 죽음이후 시간이 멈춰진 듯 살고 있다.

아들의 기일에 술에 취해 건들건들 찾아온 박태석에게 전처는 소리친다. “남들이 다 잊어도, 당신은 기억하고 있었어야지” 며칠 후 또 다시 비몽사몽간에 전처의 집에 간 박태석은 “너도 그만 잊고, 나처럼 살아라, 그래야 내 맘이 편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전처는 힘주어 내뱉는다. “편하게 살지 마. 단 한 순간도. 그게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유일한 거야”

드라마는 잘나가던 속물 변호사가 알츠하이머병을 진단받고 지금껏 자신이 충성해왔던 가치와 다른 삶을 사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드라마 <펀치>를 연상시킨다. <펀치>에서는 출세 지향적이던 검사가 뇌종양을 진단받은 뒤 자신이 충성해 온 권력을 적으로 삼아 정의롭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억>은 그와 비슷한 포맷을 지니지만, 그것보다 더 철학적인 은유를 품고 있다. 박태석이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병을 기점삼아, 기억과 망각에 대한 중요한 논의들을 풀어놓기 때문이다.



◆ 망각과 출세의 짝패

지금 박태석의 기억은 뒤죽박죽이 되어 있다. 그는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아들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기억의 수면 저 아래에 두었다. 그런데 무의식의 심해에 있던 그 기억들이 알츠하이머병으로 엉킨 기억의 실타래를 뚫고 수면위로 올라온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잊고 살고자 하였지만, 그의 무의식 속에 여전히 살아 있던 기억이 몸의 기억을 통해 출몰한 것이다.

그가 아들의 죽음을 잊고자 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물론 너무 괴로운 나머지 산 사람은 살아야겠기에 잊는다는 방어적 심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드라마가 박태석을 통해 제시하는 상황은 그보다 훨씬 적극적인 의미에서 망각을 전유한 것이다. 드라마는 박태석의 상황을 통해 망각의 정치학을 사유한다. 박태석이 아들의 죽음을 잊은 것과 그의 출세 지향적 삶은 한 묶음으로 배치된다. 그가 고급 로펌에서 일하게 된 것은 아마도 로펌 대표(전노민)의 이유 있는 영입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펌 대표는 자신의 아들이 저지른 뺑소니 사고를 덮고, 죽은 아이의 아버지인 박태석을 장기적으로 곁에 두고 관리하기 위해 로펌에 영입했을 것이다.

로펌에 온 박태석은 처음에는 아들의 죽음을 밝혀보려고도 했지만, 이후 포기하고 로펌에서 반드시 필요한 특별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며 출세의 길을 달린다. 즉 박태석이 로펌에서 VIP들을 위해 온갖 뒤치다꺼리를 해주며 승승장구한 것은 아들의 억울한 죽음이 은폐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박태석은 아직 그 연결고리를 모른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왕이 자신이 죽인 사람이 아버지인줄 몰랐다고 해서 얄궂은 운명이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박태석이 가해자가 누구인지 몰랐다고 해서 망각과 출세의 맞물린 구조가 부인되지는 않는다.



요컨대 그가 이 세계에서 잘나가는 변호사로 살기 위해서는 그는 아들의 죽음을 잊어야 한다. 나를 출세의 장으로 이끌고, 나와 성공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이들이 바로 내 아들의 죽음을 은폐하는 권력이지만, 나는 그에 충성하며 잘 먹고 잘 살아왔다. 아들의 죽음을 잊은 대가로 성공한 것이다. 즉 이 세계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진실, 정의, 순수, 인간적 가치 등을 억압하고 포기해야 한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서 아들의 죽음을 잊는다, 그리고 가해자들과 타협한다.

드라마가 박태석을 통해 설정한 은유의 구도는 이것이다. 이 구도를 확연히 깨닫게 되었을 때, 박태석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운명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어떤 윤리적 선택을 하는지가 중요하듯, 진실을 알게 된 박태석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드라마의 주제가 함축될 것이다. 그의 윤리적 선택을 신동일 감독의 영화 <나의 친구, 그의 아내>(2008)와 더불어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 있는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역시 부부의 삶을 경제적으로 돌보아준 친구와, 아들의 죽음이라는 진실 사이에서 벌어지는 윤리적 긴장을 담고 있다.



◆ 경제를 위해 망각을 강요하는 사회

드라마가 제시하는 망각과 출세의 짝패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식을 품는다. 드라마는 로펌대표의 대사를 통해 이러한 문제의식을 더 노골적으로 내비친다. 뺑소니 가해의 기억으로 15년간 죄의식에 시달리는 아들에게 그는 말한다. 언제까지 과거의 실수에 얽매어 살 거냐고. 과거의 불운 따위는 깨끗이 털어버리고, 로펌의 후계자로 당당하게 살라고. 다시 운전대도 잡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라고.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가해자로서 진실을 밝히거나, 합당한 처벌을 받거나, 사죄를 통해 피해자 회복에 나서는 모든 일을 ‘과거에 얽매이는 못난 짓’으로 정의하는 저 사고는, 어째 낯설지가 않다. 세월호에 대한 진상규명보다 경기회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정부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나 배상 없이 한일관계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말과 무엇이 다를까.

드라마 <기억>의 포스터는 물 위에 정강이까지 발을 담근 이성민의 모습을 담는다. 출렁이는 바다는 의식과 무의식, 기억과 망각의 경계를 가르는 수면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바다가 바로 세월호가 잠긴 바다로 보이기도 하고, 영화 <귀향>의 나비가 씻김굿을 통해 힘찬 날개 짓으로 건너오던 바다로 보이기도 한다.

드라마는 묻는다. 인생에서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경제적인 가치를 위해 억압된 기억은 무엇이고, 강요된 망각은 무엇일까. 망각 속에 묻어두었던 진실과 정의는 어떻게 무의식 속에 머물다가, 기필코 의식의 수면위로 떠오르는가.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과 망각은 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가.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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