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계약’을 살린 이서진과 유이 연기의 특별한 힘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재벌가의 까칠한 남자와 가난하지만 당차고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사랑에 빠진다. MBC 주말극 <결혼계약>의 사랑은 우리가 익히 보아온 설정이다. 심지어 같은 시간대의 전작인 <내 딸 금사월>에서조차 강찬빈과 금사월 사이에 이런 사랑이 존재했다. 하지만 비슷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결혼계약>은 <내 딸 금사월>을 보느라 피폐해진 시청자들의 마음을 힐링해 주는 드라마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결혼계약>에는 신데렐라 사랑, 불치병, 남편과의 사별 이후 홀로 아이를 키우는 당찬 여인, 삼각관계, 재벌가 아들끼리의 반목 등등 극적인 상투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결혼계약>은 극적인 상황들을 시청률 보증수표로 남발하는 대신 진실하고 깊이 있게 그려낸다. 극적인 상황을 설정해 놓고 그 설정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들이 어떻게 흘러가고, 만나고, 헤어졌다, 다시 맞물리는지를 꽤 섬세하게 포착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결혼계약>의 여주인공 강혜수(유이)는 낡은 사진 속 여인 같은 인물이지만 어느덧 시청자는 그녀의 삶을 고스란히 따라가며 감정이입한다. 사별 이후 홀로 아이를 키운 여인, 당당하고 용기 있지만 눈물 또한 많은 여인.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혜수는 아이의 장래를 위해 계약금을 받고 재벌가의 남자와 계약결혼을 감행한다. 재벌가의 서자인 한지훈(이서진)의 친모 오미란(이휘향)에게 간이식 수술을 해주는 일이 계약조건이다.



극 초반 한지훈은 혜수를 단순히 가난에 쪼들리고 사채 빚에 쫓기느라 삶이 피폐해진 여인으로만 바라본다. 하지만 계약결혼 이후 지훈은 혜수의 환경이 아닌 그녀 자체를 알아간다. 그런 면에서 도로 한 복판에서 비에 흠뻑 젖은 채 서 있는 혜수와 미란 두 여인을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는 한지훈의 모습은 이 드라마의 중요한 장면 중 하나다. 한지훈은 아버지의 첩으로 살아온 친모에게 혐오와 사랑 두 개의 감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더구나 지훈은 어머니를 그리워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살지 못한 채 아버지의 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인물이다.

혜수 또한 지훈의 친모처럼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 여인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한탄하며 살아온 친모와 달리 혜수는 딸인 은성과 함께 살아가며 어떻게든 당당하게 삶을 유지하려 애쓴다. 지훈은 재벌가의 아들로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깨닫지 못한 행복한 일상의 모습을 혜수와 은성 사이의 관계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어느새 혜수와 은성, 그 가족의 자리에 자신 또한 들어가 있기를 바란다. <결혼계약>에서 지훈은 은성이란 여인에게 사랑을 느끼는 동시에, 은성이 만들어놓은 가족의 자리에 자신도 함께하기를 바라는 셈이다.



또한 혜수가 지훈에게 빠져드는 심리 변화 역시 드라마는 섬세하게 잡아낸다. 까칠하고 제멋대로였던 남자에게 혜수는 어느덧 빠져들고 지훈의 첫사랑인 재벌가의 여자에게 질투의 감정을 느낀다. 그런 소소한 혜수의 감정을 잡아내는 솜씨도 빼어나지만 역시 이 드라마의 백미는 지훈의 진심을 확인한 후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지훈을 밀어내면서 속으로는 그를 사랑하는 혜수의 감정들일 것이다. 죽음 앞에 처한 여주인공의 내면을 이렇게 여운 있게 담아낸 작품은 생각보다 꽤 오랜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드라마 <결혼계약>에서 유이와 이서진은 남녀주인공으로 꽤 독특한 역할을 하는 듯하다. 잘 짜인 이야기인 건 틀림없으나 <결혼계약>은 반전 없는 흐름의 드라마다. 이 드라마를 긴장시키는 건 유이와 이서진의 살짝 껄끄러운 연기다. 다른 드라마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두 주인공은 자칫 너무 드라마적이고 낡아 보일 위험이 있는 <결혼계약>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다.

유이와 이서진 모두 테크닉이 뛰어난 배우들은 아니다. 유이의 표정은 어느 장면에서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그녀의 울음은 연기라기보다 너무 날 것의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유이의 연기는 이 익숙한 플롯의 드라마에서 강혜수란 인물을 픽션 아닌 논픽션의 주인공처럼 만드는 힘이 있다.



이서진의 연기 또한 비슷한 힘이 있다. 그가 극 자체에 온전히 녹아드는 모범생 타입의 배우였다면 오히려 한지훈은 흔한 드라마의 흔한 재벌가 남자주인공으로 끝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서진은 이 극에서 툭툭 돌출하는 느낌이 든다. 그의 대사나 움직임은 무언가 삐걱거리지만 대신 능숙한 배우가 아닌 좋은 집에서 잘 자라온 적당히 철없는 남자의 태도 자체가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 그 때문에 유원지에 홀로 쭈그려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이 나이든 남자의 연기에는 드라마에서 흔히 보지 못하는 신선함이 있다. 여주인공 강혜수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나 병실에서 친모와 대화를 나누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그런 감정 폭발의 장면에서 이서진의 연기가 어색하고 밋밋하거나 혹은 억지스럽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을 터다. 하지만 멜로물의 꽃 같은 남자배우가 아닌 진짜 남자들의 눈물이나 감정의 표현은 딱 그 정도 선이다. 희한하게 이서진이 그 지점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혼계약>의 한지훈은 꽤 신선한 멜로물의 남자주인공으로 탄생한다. KBS 주말극 <참 좋은 시절>에서 완전 망한 주인공이라고 느꼈던 이서진이 이렇게 괜찮은 남자주인공으로 돌아올 줄은 이 드라마 첫 회 첫 장면에서 이서진의 가슴 노출 연기를 볼 때만해도 미처 짐작하지 못한 부분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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