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어화’ 한효주가 가련해 보인다면, 거리두기에 실패한 것이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해어화>는 1940년대 권번의 기생출신으로 가수가 된 여인들을 그린다. 1940년대 경성거리와 화려한 권번 문화와 예쁜 의상 등 볼거리가 가득하다. 영화음악도 흥미롭다. 처음 들어보는 정가를 비롯해, 당시 국민가수였던 이난영의 곡들과 영화를 위해 새로 만든 <조선의 마음>은 상당히 들을만하다.

주연을 맡은 한효주와 천우희는 가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노래실력을 보여준다. 영화가 비추는 1940년대 음반녹음 과정이나 클럽의 공연 모습 등은 재미난 볼거리이다. 더욱이 한효주는 자신의 필모 안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빗속에서 연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처롭게 노래하던 앳된 표정은 진심으로 사랑스럽다. 이후 차갑고 무표정하게 변해가는 한효주는 절정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장점은 여기까지다.

영화의 여러 흥미로운 요소들은 영화전체에 녹아들어 새로운 감동을 빚어내지 못한다. 영화가 낡은 삼각멜로에 빠져드는 탓에, 흥미로운 요소들은 눈 밖으로 밀려난다. 인물들의 심리나 관계도 정교하지 못하다. 소율(한효주)와 연희(천우희)가 어떤 애틋한 마음의 동무였는지 별반 공감이 되지 않는 탓에, 후반부의 파국이 정서적으로 잘 설득되지 못한다. 인물에 대한 공감 없이 그저 ‘치정극의 종말’ 쯤으로 거칠게 이해될 뿐이다. 영화는 기생과 대중가수를 둘러싼 꽤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지만, 그 마저도 질척한 멜로드라마 속에 파묻혀 버린다.



◆ 기생의 정체성, 예인 혹은 창녀?

영화는 ‘기생’의 존재에 대해 여러 말을 쏟아낸다. ‘해어화’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기생을 가리킨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말을 알아듣는 꽃’인 양귀비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는 뜻의 덕담에서 온 말이다. 그러나 여성을 ‘말을 알아듣는 꽃’으로 칭하는 것은 주체성을 말살하는 말이다. 하지만 권번에서는 이 말을 ‘예술을 이해하는 자’라고 능동적으로 해석하며, 기생을 예인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생 업의 본질은 ‘남자의 마음을 사는 것’이라 한다.

영화는 서두에 이 말을 이원적으로 들려준다. 예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주로 일패(엘리트)기생에게, 성적 대상으로서의 정체성은 삼패(하류)기생에게 적용된다. 이를테면 엘리트 기생은 예인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성적 대상이란 뜻이다. 권번 안에서도 ‘창녀’에 대한 혐오와 부인은 높다. “그렇다면 창녀란 말이냐?”는 식의 존재론적인 반문이 종종 튀어나온다. ‘기생≠창녀’이지만 기생의 업은 ‘창녀’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은 영화 속에서 종종 애매해지거나 흔들리곤 한다.

명창의 딸로 어려서부터 권번에서만 살아온 소율은 어린나이에 전통음악인 정가에 소질을 보인다. 그는 권번을 ‘재밌는 것을 많이 배울 수 있는’ 예술학교로 인식하며, 기생은 예인이라는 믿음으로 자부심이 높다. 권번 최고의 엘리트 기생으로 성장한 소율은 고급 예술의 취향을 지녔다는 총독부 경무국장 앞에서 정가를 부른다. 조선 정가와 일본 정가에 대해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소율은 당연한 수순인양 경무국장이 잠자리를 제안하자 당혹해한다. 그 자리를 정중히 사양한 소율은 스승에게 “기생은 창녀인가?” 묻는다. 그러자 스승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 말한다. 스승이 가르친 ‘기생의 도’와 소율이 배운 ‘기생의 도’가 사뭇 달랐던 모양인데, 여기서 영화가 품고 있는 ‘기생의 도’는 정확히 무엇인가?



연희가 ‘윤우 오라버니’(유연석)와 가수 이난영의 인정을 받아 가수로 데뷔하자, 소율은 예인으로서 좌절감을 느낀다. 그는 기꺼이 경무국장의 첩이 된다. 성을 매개로 권력을 얻어 사랑과 예술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것이다. 스스로 부인하던 ‘창녀’의 길을 택한 소율은 복수를 거듭할수록 열등감과 허탈감에 빠져든다. 자신의 복수로 죽음의 위기에 빠진 연희가 “더러운 창녀”라고 비난하자, 소율은 후일 윤우에게 묻는다. “내가 왜 창녀가 되었는지 물어봐야지?”

대체 그는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자신은 기생은 예인이지 창녀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살아왔는데, 그런 자신이 경무국장의 첩이라는 ‘창녀 짓’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연희와 윤우 탓이라는 것이다. 일단 기생의 업에서 성매매를 완전히 분리하는 사고에 동의하기도 어렵지만, 자신의 선택이 예인으로서 실패한 본인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라, 자신이 행한 복수의 피해자인 연희와 윤우에게 있다는 뜻이다.

강박적인 이분법을 믿고 살다가, 실연에 대한 보복치고는 과도한 악행을 저지르고 나서, ‘순수했던 내가 이렇게 타락한 것은 모두 너 때문’ 이라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율은 지금 자신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삶이 짓밟힌 이가 당하는 고통보다, ‘타락한’ 자신에게 더 큰 연민을 느낀다. 연희의 생사를 묻는 윤우에게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이라 말하는 소율은 이미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윤리적 파탄을 보이고 있지만, 영화는 그런 소율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 소율은 과연 예인이기는 했나

영화 <해어화>가 흥미롭게 보여주듯이 기생은 전통적인 신분에 속한 존재로 전통예술의 계승자이자, 대중문화가 막 발흥하던 시절에 서양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여 대중문화를 이끈 주체였다. 실제로 카메라 앞에 선 최초의 여배우였던 이월화를 비롯해, 석금성, 복혜숙 등이 기생출신의 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정가의 대가였던 소율이 유행가 가수가 되고자 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윤우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소율의 욕망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것은 자신이 오롯이 간직해온 예인으로서의 정체성과도 걸맞다.

기생의 아들이자 유학파 엘리트인 윤우는 ‘기생의 도’를 비웃진 않지만, 기생의 노래를 비판한다. 일종의 엘리트 예술로서 소수 권력자들만을 위한 노래일 뿐, 대다수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에 공감한 소율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가수가 되려한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와 창법은 정가에 익숙한 것이어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정가나 계속 하지”라는 비아냥거림을 듣는 소율은 연희의 노래를 따라한다. 하지만 점점 아류가 될 뿐이다. 소율은 자신이 권력을 통해 연희의 음반을 폐기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스스로 예인의 정체성을 지닌 소율이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지 의아스럽지만, ‘치정은 힘이 세다’는 명제를 받아들이며 넘어가자. 그런데 이후 소율은 자신이 폐기한 연희의 노래가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놀란다. 권력이나 인위적인 조작으로 좌우할 수 없는 ‘유행가의 힘’을 절감한 것이다. 그가 진심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노래의 생명력을 느꼈다면, 그는 대중예술가로서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처절한 반성에 이르렀어야 옳다. 하지만 소율은 자신이 대가로 인정받았던 정가의 고급 예술적 가치를 쉽게 버렸듯이, 대중예술의 가치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처럼 얄팍한 예술관을 지닌 그가 과연 한 분야에서 인정받는 예술가이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소율은 과연 예인이기는 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영화가 ‘예인의 도’를 너무 가벼이 본 것은 아닐까.



◆ 소율이 가련해 보인다면, 거리두기에 실패한 것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마지막 대목이다. 1991년에 발굴된 미발매 음반 <조선의 마음>의 주인공 서연희를 수소문하는 방송국의 부름에 늙은 소율이 응한다. 수십년이 지난 후, 젊어 자신이 행한 어리석은 복수에 대한 회한과 친구에 대해 그리움을 풀어 놓을 것이라는 관객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그는 자신이 바로 연희라고 밝히며 무대에 올라 연희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곤 “그때는 왜 몰랐을 까요. 이렇게 좋은걸”이라며 점잖게 회한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이후 몇 장면을 통해 소율은 똥물을 뒤집어쓰는 것 같은 지독한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누군가 그가 연희가 아닌 소율임을 알아본다. 권번의 열등생으로 돈 많은 영감의 첩이 되어 가수가 되려 했던 옥향은 권번의 기생들에게 ‘창녀’라고 비난받던 인물이다. 옥향은 소율이 자신을 위로했던 말을 돌려주며 소율을 다독인다. 그러나 소율은 자신이 결코 동일시하고 싶지 않은 옥향의 위로를 통해, ‘창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더 분명히 느낀다. 음악PD는 소율의 음반을 굳이 들이대며 소율이 연희의 아류였음을 확인사살 해준다. 그 바람에 소율의 유일한 명곡으로 인정되는 <사랑, 거짓말이>을 만들어주며 윤우가 남겼던 말, “헛된 나를 버리고, 너를 잃지 마라”는 메시지가 환기된다. 너.를.잃.지.마.라.

소율은 연희와의 마지막 순간과 윤우와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모든 것을 빼앗긴 피해자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홀로 남아 자신이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음을 자인해야 한다. 윤우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가수로 성공하지 못한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창녀’가 아닌 예인으로서의 자존감, 어린 시절부터 쌓아왔던 자신의 음악세계, 그리고 자신의 이름까지. 이제 그는 자신이 누군지조차 알지 못한다. 예술가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이보다 독한 파멸이 있을까. 가장 좋은 복수는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건만. 소율이 겨눈 복수의 칼날은 결국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영화는 소율의 극단적인 선택과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당시의 열등감과 원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소율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소율을 통해 순박함과 잔혹함을 동시에 지닌 꽤나 입체적인 여성상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는 예인으로 자랐지만, 가장 치졸한 방식으로 권력을 끌어들여 예술을 파괴했다. 오로지 이성애와 질투에 눈이 멀어 친구는 물론 자신의 노래와 인생까지 통째로 날려버렸다. 여성을, 예술가를 얼마나 단순한 존재로 이해했으면 이런 서사를 풀어낼까. 물론 치정은 힘이 세다. 누구나 젊은 시절 정념에 휩싸여 실수를 한다. 그러나 수십 년간 자기 행위에 대한 아무런 성찰에 이르지 못하고, 미숙하고 유아적인 인격을 유지하며 사는 인물을 어찌 보아야 할까.

세상에는 이처럼 표피적인 인격의 소유자도 존재한다. 영화가 그런 인물을 그리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영화가 이러한 인물에게 정서적으로 밀착한 채 그의 행위에 거리를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총독부 경무국장의 애첩이었던 그가 해방 후 성난 군중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장면에서, 소율이 그저 가련해 보인다면 그건 거리두기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수십 년 만에 나타나 여전히 연희를 사칭하고 흉내 내면서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이렇게 좋은걸”이라는 회한을 내뱉는 그가 뜨악해 보이지 않고 여전히 곱상해 보인다면 그건 거리두기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해어화>스틸컷]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