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느리지만 우아하게 기억과 인간의 삶을 담아내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tvN 금토드라마 <기억>은 방영 전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한 드라마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기억>은 성공한 변호사가 알츠하이머를 겪으며 싸워가는 눈물겨운 투병 드라마가 아니다. KBS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마왕>과 <부활>로 유명한 박찬홍 PD와 김지우 작가 콤비는 알츠하이머를 통해 우리가 잊었던 삶의 순간들을 포착해낸다. 느리지만 우아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드라마는 남들이 보기에 성공은 했지만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대형로펌의 변호사 박태석(이성민)의 삶을 파고든다. 그리고 드라마는 이 성공한 남자가 잊어버린 피와 눈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피는 혈육에 관한 이야기이며, 눈물은 이 남자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다.

“기억하기 싫은 것만 잊어버리는 약 없냐?” (박태석)

사실 박태석의 내면에는 큰 상처들이 남아 있다. 그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은 못난 아비 덕에 지극히 비참했다. 평범한 국선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그의 결혼은 비극으로 끝났다. 어린 아들 동우가 뺑소니 사고로 사망하면서 부부 사이의 골이 깊어져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서다. 하지만 그 후 박태석은 대형로펌 태선에 스카우트 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승승장구의 삶을 맛본다. 그렇기에 지금 현재 그의 삶은 두 개로 양분되어 있다. 인간미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승률 최고 변호사의 삶과 새로 꾸린 가정에서 아내와 두 아이의 좋은 가장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알츠하이머 발병 이후 성공한 남자라 믿어왔던 그의 삶이 처참히 무너져간다.



기억 2회에는 이런 공포의 순간을 포착한 명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가족과의 저녁약속을 위해 강남의 어딘가로 여겨지는 대로변을 운전하는 박태석의 모습이다. 하지만 늘 익숙한 도로에서 그는 길을 잃고 만다. 갑자기 기억의 회로가 끊어진 것이다. 자동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온 박태석은 어느새 공황상태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의 공포와 상관없이 밤의 도로에서는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의 불빛들이 질서 있게 움직인다. 화면 속에서 이 남자는 지극히 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인다. 그는 금방이라도 이 도시의 물결치는 화려한 급류 속에 익사할 것만 같다.

동시에 카메라는 고층빌딩 레스토랑의 유리벽을 잡아낸다. 유리벽 안쪽에는 박태석의 아내와 아이들이 앉아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박태석 주위의 모든 풍경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가 결국 사방이 암흑으로 변한다. 마치 그것이 이 대도시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남자의 미래라는 것을 예견하듯.

그런데 흥미롭게도 드라마 <기억>은 알츠하이머를 통해 무너져가는 성공한 중년남자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삶을 다시 반전시킨다. 극 초반 그는 알츠하이머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극이 진행 될수록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음미하는 순간들을 조금씩 경험한다.



“고장 난 건 머리인데, 왜 아픈 건 마음인지 모르겠어.”(박태석)

심지어 그가 다 묻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삶을 찢고 불쑥불쑥 나타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현재의 삶은 암전에 가까워지지만 마음에서는 그가 잊고 있던 타인에 대한 따스한 온기가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는 어느새 승률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한 피의자를 위한 법조인 역할을 자처한다. 결국에는 국선변호사 시절 자신의 잘못으로 억울한 누명을 쓴 살인범을 위해 다시 나선다. 그의 삶이 완전히 암전되기 전 과거의 잘못을 되돌려 놓으려는 의미로.

한편 <기억>은 극 중반 은근슬쩍 수사물의 이야기가 흘러든다. 하지만 그건 현재의 사건 이 아닌 과거의 사건이다. 하지만 과거의 뿌리가 여전히 현재의 삶을 뒤흔드는 사건이기도하다. 바로 동우의 뺑소니 사고가 실은 대형로펌 태선의 대표 이찬무(전노민)의 아들이자 현재는 로스클 재학생인 이승호(여회현)가 저질렀던 사고였던 것. 이찬무는 아들의 범죄를 몰래 덮는 대신 속죄의 뜻으로 박태석을 스카웃한 셈이다.

“죄를 지었을 때 느끼는 게 죄책감. 죄를 들키면 느끼는 게 수치심. 죄책감은 무죄, 수치심은 유죄. 하늘과 땅 차이야.” (이찬무)



이찬무와 이승호 부자는 겉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금수저의 후예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과거의 부끄러운 기억에 사로잡혀 수치심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박태석과 그의 전처인 판사 나은선(박진희)이 기억 속에 묻힌 사건들을 파헤치려 들자 어떻게든 그걸 막으려고 버둥거린다.

드라마는 이처럼 현재진행형이 아닌 과거의 사건을 다시 밝혀내면서 기억이란 화두를 중심으로 꽤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기억>을 보는 일은 기억이란 엉킨 과거의 실타래 속으로 들어가 다시 그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 과정의 속도는 느리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다. 오히려 빠져들다 보면 특유의 긴장감에 전율하는 순간들이 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박태석의 변화하는 감정들은 물론이거니와 흐르는 진땀 하나하나까지 다 생생하게 표현하는 주연배우 이성민이 있다. 그리고 박태석의 아내인 서영주를 연기하는 배우 김지수의 연기 또한 이성민과 대조적인 매력이 있다. 서영주는 한국 드라마에서는 흔치 않게 수채화처럼 옅은 색의 감정만 지닌 여인이다. 김지수는 그 인물의 감정선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도 정확한 감정들을 섬세한 표정으로 잡아낸다.

배우들의 호연과 맞물려 <기억>은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드라마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하다. 너무 자극적이거나, 너무 현란하거나, 너무 사랑 받으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모든 것을 정교하게 담아낸다. 이야기와 화면과 연기가 빈틈없이 서서히 맞물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이 꽤 강한 잔상을 남기는 건 궁극적으로 이 드라마의 인물들이 재미나게 꾸며낸 얄팍한 등장인물이 아니라 복잡한 내면을 지닌 인간 자체를 담아내서다. 기억 때문에 살아가고, 기억 때문에 상처받고,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기억을 마주쳐야만 하는 족쇄에 묶인 불쌍한 인간 말이다. 그리고 알츠하이머라는 충격적인 백지 상태의 순간에 가까워져서야 겨우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아는 그 나약한 존재 인간 말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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