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초인’의 평온한 선량함을 주목해서 본다면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서은영 감독의 <초인>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이 영화의 평온한 선량함이다. 이는 괴상한 일이다. 정상적인 세계라면 이는 가장 눈에 뜨이지 않은 특징일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한국 영화판은 결코 정상적인 곳이 아니다.

아이즈의 최지은 기자는 이 작품을 ‘모범적인 청소년 성장소설을 공들여 영화로 옮긴 것 같다’고 평했는데, 이는 흥미로운 반응이다. 풀어 쓴다면 선량함, 낙천성, 온화함이 한국영화의 당연한 특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문학이라는 외부 장르의 특징을 가져와야 한다.

최근에 만들어지는 한국 청소년 주인공 영화들을 보면 <초인>과의 대비가 더욱 두드러진다. 이들은 대부분 학교 폭력이나 가정 폭력의 희생자이고 거의 병적인 울분과 분노를 품고 있으며 그 감정은 종종 파괴적인 폭력을 통해 터져 나온다. 더 나쁜 경우엔 그 울분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한 채 그 더러운 세계의 일부가 된다. 아,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남자아이들이다.

<초인>에는 그 어느 것도 없다. 두 주인공인 아이들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남자아이의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고 여자아이는 스포일러라 여기서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끔찍한 일을 겪었다. 하지만 이들은 억울해하지도 않고 울분을 토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다른 길을 찾는다.

그 다른 길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그 두 가지는 모두 당연한 게 정상적인 것이다.

하나는 의미 있는 대화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한국 청소년 주인공 영화 남자주인공과는 달리 이 영화의 남자아이 도현은 여자아이 수현과 꾸준히 대화를 한다. 자기 이야기도 할 뿐만 아니라 여자아이의 이야기도 경청할 줄 안다. 수현에겐 감추고 있는 비밀이 있고 도현 역시 대화에 그렇게 능숙한 편은 아니라 영화 내내 덜컹거리지만 그래도 두 사람에겐 정상적이고 품위 있는, 적어도 그런 품위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의사소통이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교양이다. 이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소재와 공간은 책과 도서관이다. 얼핏 보면 뻔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지적 과시나 겉꾸밈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상과 이야기의 일부로 교양을 다루는 한국영화가 얼마나 되나. 그리고 애당초부터 책과 도서관을 제대로 쓸 줄 아는 한국영화가 얼마나 되나. 이는 의외로 힘든 작업이다. 책을 선정하고 꽂는 데에만 해도 상당한 공이 들어간다. 그리고 <초인>은 어색하지도 않고 유식한 척하지도 않으면서 편안한 책벌레 영화가 되는 데에 성공한 희귀한 한국영화이다.

왜 이런 영화가 이렇게 드문 것일까. 세상이 더 힘들어지고 거칠어지고 폭력적이 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모든 영화가 그래야 한다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아무리 뻔하고 진부한 세계라고 해도 그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다양하기 마련이고 예술은 그 모든 스펙트럼을 커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심지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뻔하고 진부하고 단순하다고 하더라도 예술은 그들이 커버하지 못하는 그 빈 부분을 만들어서라도 채워야 한다.

예술은 단순한 삶의 모사가 아니다. 예술은 우리가 못 보는 가능성을 찾고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이기도 하다. 삶의 극단성과 끔찍함만을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세상과 자기에 대해 솔직하다고 믿겠지만 사실 그들은 그냥 게으른 것이며 천진난만하다는 이유로 놀림받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덕택에 비슷비슷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동안 광대한 미개척지가 남게 된다. 그리고 <초인>은 그 미개척지의 영역에 편안하게 안착한 작품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초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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