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이러니 나홍진 감독 재능에 경탄할 수밖에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곡성>은 암시와 반전을 통해 감독이 설치해놓은 덫에 관객을 빠뜨리는 영화이다. 즉 감독의 통제 하에 트릭아트를 즐기는 것이자, 관객과 함께 하는 게임에 해당된다. 장르의 법칙을 따라 가다 뒤트는 형식을 취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인 영화는 아니다. 종교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인간 존재론을 풀어놓는다.

혹자는 영화의 전개가 정직하지 않다고 불만을 표출한다. (참고 : 김현민 <일차원적 현혹의 자기모순> 아이즈. 정한석 <‘곡성’, 나홀로 유감> 국제신문) 일종의 변칙 플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감독은 플레이를 시작하기 전에 너무도 정직하게 자신의 패를 두 개나 까 보인다.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주제와 형식에 대해, 결정적인 힌트를 알려주는 것이다. 첫째는 누가복음 24절의 구절. 이는 영화의 주제를 말하는 것으로, 영화는 이 성경구절을 영화의 마지막에 아예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둘째는 낚시하는 일본인. 영화는 낚시하는 일본인과 그가 미끼를 끼우는 장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이는 ‘낚시와 미끼’에 대한 일광의 대사와 맞물리며, 영화의 서사를 일러스트 적으로 밝히는 셈이다.

화투로 치면 두 개의 패를 까고, 바둑으로 치면 두 수를 접어주고 시작하는 셈인데, 이렇게 하고도 혹시 너무 어려울까봐 중간에 또 힌트화면이 나간다. 가령 훈도시. 영화는 종구와 오형사가 성인의 기저귀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장면을 통해, 한국인에게 훈도시가 얼마나 낯선 것인지 확인시킨다. 그리고 일본인의 훈도시와 일광의 훈도시를 세 장면에 걸쳐 보여준다. 또는 굿. 무명이 종구를 처음 만난 장면에서, 무명은 불난 집의 살인사건을 말하면서 “아줌니는 굿을 안 하겠다고 했는디, 할매가 굿을 하자고 해서”라며 굿과 일가족 몰살의 상관성을 말해준다.

이처럼 도처에 힌트를 깔아 놓은 것은 감독이 관객을 단순히 현혹시키고 기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짠 미로게임 속으로 관객을 초대하여 함께 그 혼돈과 착시를 즐기고 이를 통해 종교적인 화두를 생각해보기를 원한 것이다.



◆ 곡성, 폐쇄적 마을 공동체에서 일어난 일

영화의 제목은 공간적 배경을 가리키는 동시에 ‘곡소리’(哭聲)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곡성은 어감 뿐 아니라 실제 장소로도 영화에 중요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원래 곡성(谷城)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란 뜻으로, 영화는 과연 그 면모를 보여준다. 영화는 지리산 자락으로 첩첩이 둘러싸인 마을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살인사건들을 보여준다. 물론 현실에서 이런 사건들이 일어났다면 외지에서 검경을 파견하는 등 훨씬 적극적인 수사에 착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곳을 폐쇄된 공동체로 밀고 나간다. 영화 속 곡성은 리얼리즘적인 행정구역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공간이다. 그곳은 폐쇄적이고 낙후된 공동체로, 외지인에 대한 혐오, 마을사람들의 집단적 완력 행사, 샤머니즘의 성향 등이 강한 곳이다.

영화 <곡성>은 마을을 둘러싼 산의 실루엣을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시킨다. 이것은 단지 멋진 스펙터클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도망가는 일본인을 쫓아 종구 일행이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 그의 시선을 통해 원경을 보여준다. 보통 이런 장면에서 산꼭대기에서 보이는 광경은 시야가 탁 트여 전체가 조망된다. 그러나 영화는 탁 트인 조망대신 저 너머 산, 그 너머의 산들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광경이다. 이것은 우리가 전체를 조망하는 위치에 놓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인간은 일어나고 있는 일의 전체를 알지 못한다. 다만 닥치는 대로 헉헉대며 아득바득 싸우고 도망치며 산에 오를 뿐이다. 또한 폐쇄된 마을 공동체로 들어나기 위해선 굽이굽이 외줄기의 도로를 타야한다.



이처럼 폐쇄적인 마을에 세 명의 이질적인 존재가 있다. 일본인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낯설게 여기는 존재이다. 그가 마을에 온 후 이상한 사건이 끊이질 않으며, 이 모든 일을 그가 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일광은 외부인이긴 하나 옆집 할매 등의 소개와 초대로 마을로 온 사람이다. 마을에는 일광 외에도 굿을 하는 무당이 더 있으며, 종구네 이외에도 일광에게 굿을 의뢰한 주민들이 있다. 즉 이곳에서 굿은 예외적인 행위가 아니요, 무당은 낯선 존재가 아니다. 일광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온 자이고, 여러 무당 중 하나로, 이질감이 크지 않다. 하지만 그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다.

무명은 얼핏 내부인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곡성은 내 나와바리”라고 말하는 종구도 무명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무명이란 이름조차 영화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은 인물, 하찮은 계집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종구는 뒤늦게 무명이 목격자라고 수소문을 펼치지만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의 존재에 의문을 가졌어야 하지만, 한동안 종구의 머릿속에서 무명은 사라진다. 종구의 머릿속에는 오직 일본인을 내쫓거나 죽여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종구가 처음 일본인의 집을 찾았을 때, 오형사는 살인사건의 증거가 될 만한 것을 목격한다. 하지만 종구는 이를 상부에 보고하고 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내쫓는 데 골몰한다. 이는 아마도 딸이 일본인에게 성폭행을 당했을 거란 짐작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마침내 종구는 그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딸이 죽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종구는 일본인을 죽이겠다고 결심하면서 “어차피 그가 귀신이면 죽지 않을 것이고, 사람이면 죽을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모순적이다. 그가 귀신이라면 죽이는 것이 무의미하고, 사람이라면 큰 죄가 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짓이다.

그런데도 그는 친구들을 규합하여 쳐들어간다. 종구가 마을 남자들을 소집했을 때 그들 사이에 별 이견이 없는데, 이는 이런 종류의 민병대적인 해법이 예전에도 구사된 적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아비가 사람을 의심하고 죽이려 하고, 결국 죽였기 때문”이라는 무명의 말에 대해 종구는 “그건 딸이 아프기 때문”이라 변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이번이 처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초현실주의적인 공포를 눈앞에 펼쳐놓으면서, 그 음각의 형태로 폐쇄된 마을이 외지인에게 행하는 폭력을 보여준다. 영화는 표면적인 서사로 보자면, 폐쇄된 마을에서 야생버섯에 의한 환각 작용으로 마을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극락도 살인사건>을 연상시키고, 외부인에게 가하는 내부인의 폭력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이끼>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주제의 면에서 보자면 <다우트>나 <리바이어던> 등과 같은 종교적인 영화들과 묘한 친연성이 있다.



◆ 폭발적인 신성모독의 파국

--그들은 깜짝 놀라며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놀라며 의심하느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나다! 자,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으나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영화는 누가복음 24절의 구절을 자막으로 띄우고 시작한다. 이건 괜히 멋있으라고 넣은 자막이 아니다. 성경에서 저 대목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 제자들에게 불신을 해소시키는 장면이다. 여기서 만져보라는 말은 가장 확실한 물적 증거로 확인시키는 것이다. 이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내 손으로 만져보아야만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가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즉 만지면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지만, 그런 일차원적인 믿음을 지양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는 뜻이다.



영화 <곡성>은 일본인의 존재에 대한 괴소문으로 시작해 여러 끔찍한 일들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인과관계나 물증은 없다. 건강원 남자가 증거라면서, 텅 빈 냉장고를 보여주는 것은 우습지만 유표적이다. 그는 메시지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메신저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즉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하더라도 그가 말한 내용이 진실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주관적인 진술을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술, 야생버섯, 꿈 등에 의한 것은 아닌지 검증이 필요하다. 종구가 직접 본 것조차도 이러한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는 종구가 수집한 불완전한 정보와 불합리한 인식체계를 통해 혼돈스러운 사태를 조금씩 보여준다. 종구는 처음에는 제법 추리도 하지만, 딸이 이상 증세를 보이자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빠져 비이성적인 판단에 휩싸인다. 영화는 종구가 동네의 소문과 무명의 말과 일광의 말을 토대로 일본인에 대한 의심을 확신으로 굳혀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반전을 통해 누구의 말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사태에 빠뜨린다.



여기서 종구는 서로에 대해 완전히 반대로 말하는 무명과 일광 사이에서 행동을 결정해야 한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무명이 종구의 손을 잡는다. 종구는 소스라치듯 놀란다. 직전에 종구는 “너 뭐여 사람이여, 귀신이여?”라고 물었지만 아마도 그때까지 종구는 무명이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놀란 것은 아마도 사람의 손과 전혀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이를테면 “사람은 살과 뼈가 있으나,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없다”의 상황이었을 수 있다.

같은 시각, 가톨릭부제는 혼자 동굴에서 부활한 일본인을 만난다. 일본인은 그의 존재를 묻는 질문에 “말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 혹은 “너는 나를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등의 화법을 구사한다. 이것은 예수의 화법이기도 하다. 그는 “너는 내가 악마라고 이미 말했으며, 너는 내가 악마라는 의심을 확인하러 온 것”이라 말한다. 예수가 행한 종교적인 확신과 의심에 대한 문답을 잠시 이어가던 일본인은 아예 누가복음의 구절을 읊으며, 자신의 성흔을 보여준다.



혼돈과 두려움에 빠진 가톨릭 부제 앞에서 일본인은 점점 악마의 모습으로 변해가며 “바로 나다”라는 예수의 말을 한다. 즉 예수가 확신의 증표로서 한 말이 가장 믿을 수 없는 사태에서 뚜렷한 악마의 형상을 한 자에 의해 조롱의 의미로 인용된 것이다. 일종의 신성모독이라고 할 만한 이 장면은 예수가 알려준 확신의 증표가 상대가 유령인지 예수인지 심지어 악마인지 판별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가톨릭 부제는 예수의 말을 읊는 악마에 의해 그의 믿음과 존재가 궤멸된다. 또한 종구는 자신의 손에 닿은 무명의 낯선 감각과 무명이 갖고 있던 물건들을 재료로 부정확한 추리를 행한다. 그는 무명의 말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끝내 그 자리를 벗어나 화를 맞는다. <곡성>은 신화적 폭력이 벌어지는 와중에 ‘던져진 존재’인 인간이 느끼는 인식과 믿음의 한계를 보여준다. 인간은 인식의 한계로 인해 전체를 조망할 수도 없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도 없다. 그저 상황에 이끌리고 주관적인 감각이나 경험에 경도된 채, 불확실한 정보를 취합하여 닥치는 대로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영화 <곡성>은 “절대 현혹되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종구를 비롯해 인간은 본래 현혹되는 존재이다. 그런데 쉽게 현혹되었다가도 그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도 못한다. 종구는 굿을 하다가도 도중에 중단시키고, 닭 울음을 기다리다가도 마지막 순간에 발길을 옮긴다. 베드로부터 종구까지 인간은 본래 닭이 세 번 울기까지 믿음을 유지할 수 없는 의심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의심하는 인간을 위해 “만져 보라”는 은혜로운 말을 남겼지만, 그 말조차 악마에게 조롱당하고, 인간에게 오판의 빌미로 활용된다.

<곡성>의 파국적인 결말은 ‘의심은 확신만큼이 강력하고 지속적’임을 보여주었던 <다우트>나, 거대한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개인을 통해 오히려 신의 섭리를 암시하였던 <리바이어던>과 같은 텍스트를 연상시킨다. 이들 모두 종교적인 텍스트인 반면에, <곡성>은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폭발적이고 신성모독적이다. 이처럼 강력한 에너지를 내뿜는 영화를 달리 떠올릴 수 없다. 토종 오컬트·좀비물이라는 국내에 거의 없었던 장르의 새장을 연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이처럼 강렬한 종교적인 메타포를 품은 영화를 만든 감독의 재능이 경탄스럽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곡성>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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