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마프’, 왠지 노희경 작가의 솜씨가 도드라질 것 같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1990년대 중반까지 드라마에서 중견 여배우들이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은 부엌과 안방을 오가는 엄마, 엄마 친구, 못된 시어머니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 데뷔했던 젊은 작가 노희경의 드라마는 좀 달랐다. 봄과 여름이 아닌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여인들의 서사가 노희경의 드라마엔 존재했다.

그렇기에 과거 노희경의 드라마는 중견여배우들의 소중한 분장실이었다. 노희경의 드라마는 그녀들이 이전까지의 얼굴과는 좀 다른 얼굴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tvN 금토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 출연하는 고두심, 윤여정, 나문희, 김영옥, 박원숙 모두에게 그러했다.

노희경 작가의 첫 장편극인 1997년 MBC 수목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부터가 이미 중견 여배우들의 색다른 변신이 인상적이었던 작품이었다. 작가 노희경이 유년시절을 보낸 1970년대 마포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는 재개발 직전 그곳에 살던 서민들의 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 고두심은 동네건달인 남자주인공 박진구(손창민)의 어머니로 등장한다. 고두심이 MBC 미니시리즈 <마당 깊은 집>에서 보여준 1950년대 억척스러운 어머니의 연장선인 인물이 이 드라마 속 어머니다. 하지만 고두심은 이 드라마에서 다른 드라마에서는 보기 힘든 한 장면에 등장한다. 그건 강제철거를 둘러싸고 깡패들과 주민들이 맞서는 장면이다.

어머니는 주민들과 함께 시위를 하고, 깡패들은 그런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막는다. 싸움은 격해지고 어머니는 마스크가 벗겨진 깡패가 바로 자기 아들임을 발견한다.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막막한 표정이 스쳐간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 자신이 지켜온 삶의 터전을 빼앗는 인간으로 돌아오는 순간과 부딪친 모성의 얼굴. 짧지만 그 순간에 어머니이자 인간으로서 수많은 감정이 오가는 장면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이후 고두심은 2004년 KBS <꽃보다 아름다워>에서는 <내가 사는 이유>와는 완전히 다른 샘물처럼 맑아서 오히려 바보 같은 엄마를 연기하면서 또 다른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배우 고두심이 노희경의 드라마 속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변주하고 변화시켰다면 배우 윤여정은 노희경의 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를 통해 새로운 캐릭터를 쌓아갔다.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마포의 작은 술집 <미인계>의 주인 손마담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 드라마나 방화 속 술집마담처럼 교태어린 웃음을 날리거나 감정적으로 신세한탄을 하는 인물이 아니다. 손에 든 담배 한 개비, 내뱉는 담배 연기로 그 수많은 시절의 감정들을 간단히 묘사한다. 그리고 정작 내뱉는 대사나 표정은 지극히 건조하고 담담하다. 마치 사람의 인생이란 아무리 아등바등 눈물범벅이라도 결국 세월이 흐르면 담배 한 갑처럼 아주 자그마한 것에 불과하다는 듯.

기존의 중견 여배우들과 다른 이런 윤여정의 연기는 이후 KBS <거짓말>이나 MBC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서 과거와 다른 세련되고 관조적인 어머니 상으로 변주된다. 그리고 이후 윤여정은 홍상수의 영화에도 어울리고 패션잡지의 시크한 컷과도 어울리는 노년의 여배우로 자리매김한다.

한편 노역배우로 유명한 배우 김영옥은 <내가 사는 이유>의 노파 김숙희를 통해 이후 할미넴의 전설을 보여준 욕쟁이 할멈의 기초공사를 쌓는다. 그리고 김숙희의 여동생 김숙자로 출연했던 배우 나문희는 그녀가 지금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인물로 등장한다. 바로 실성해 여섯 살짜리 아이로 돌아간 김숙자 역이었다. 그리고 평소 얌전한 어머니나 딱딱거리는 시어머니일 때는 볼 수 없었던 처연하고 쓸쓸한 백치의 표정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얼굴은 이 드라마를 떠올릴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표정이기도하다. 1970년대의 사람,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떠밀려 대도시 너머로 사라져버린 어떤 사람들의 넋을 잃은 얼굴들.



한편 <별은 내 가슴에> 이후 과장되고 코믹한 악역의 완성판을 보여준 배우 박원숙은 노희경의 드라마에서는 오히려 담백한 연기를 보여준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노희경의 또 다른 장편극인 SBS <화려한 시절>에서 주인공 형제의 순하고 순한 그 시절 어머니로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평소 보여주었던 캐릭터와 달리 이 드라마의 흑백사진처럼 추억어린 분위기에 어울리는 어머니상에 어울리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한지붕 세가족> 이후 박원숙이 그렇게 순두부처럼 여린 엄마의 모습으로 우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tvN의 <디어 마이 프렌즈>는 이처럼 작가 노희경과 손을 잡았던 중견 여배우들이 모두 등장하는 작품이다. 그것도 극의 중심이 아닌 뭉근한 양념같은 조연이었던 과거와 달리 이 드라마는 그녀들이 모두 극의 중심이다. 과연 노년의 여인들 사이의 이야기만으로 흥미로운 미니시리즈를 만들 수 있을까?

다른 작가라면 의아했겠지만 노희경이라면 기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라면 노년의 인물을 못된 시어머니로 그리거나 오히려 너무 지혜로워 단조로운 인물로만 그리지는 않을 테니까. 많은 세월을 겪어오며 살아온 이들의 마음에 고여 있는 아기자기하고 너덜너덜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더구나 개인적으로는 노희경 작가가 보여주는 최근의 쿨한 사랑의 대사보다 끈끈한 여러 감정들의 대사를 더 좋아한다. <디어 마이 프렌즈>에는 왠지 그런 작가의 솜씨가 도드라질 것 같은 기대가 있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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