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춘할망’ 무조건적인 사랑 통해 성장과 치유의 기적을 보여주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계춘할망>은 의외의 캐스팅과 제주의 풍광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영화는 제주해녀 할머니를 통해 모성을 일깨우며, 나름의 반전을 통해 치유와 반성과 성장을 이야기한다.

영화 <계춘할망>은 유채꽃이 만발한 제주와 상괭이가 뛰노는 바다를 비추며 시작된다. 해녀 할머니에게 어린 손녀가 묻는다. “바다가 더 넓어, 하늘이 더 넓어?”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을 보며 자라는 아이라면 궁금할 것이다. 당연히 하늘이 더 넓다고 답할 줄 알았더니, 할머니는 바다가 더 넓다고 답한다. 손녀가 자라면서 이 답은 부인된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추인된다. “봐. 바다가 하늘을 품고 있잖아.” 여기서 바다는 할머니를 뜻한다. 세상의 모든 시름을 감싸 안은 할머니의 품이 세상보다 넓다는 뜻이다. <계춘할망>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인 할머니에 대한 헌사이자, 할머니의 사랑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자기 삶을 살게 된 소녀의 성장담이다.

◆ 무조건적인 믿음과 무조건적인 사랑의 힘

계춘(윤여정)은 손녀 혜지와 단둘이 산다. 아들은 죽었고, 며느리는 외지로 떠났다. 아직 ‘물질’을 할 수 있으니 생계 걱정은 없고, 조카 노릇하는 이웃사촌 덕에 외롭지도 않다. 계춘은 혜지와 함께 서울에 올라갔다가 그만 혜지를 잃어버린다. 12년간 애타게 손녀를 찾던 계춘은 어느 날 손녀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는다.

탈학교 청소년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소소한 범죄에 가담해오던 혜지(김고은)는 우연한 사고에 휘말린 뒤, 미아를 찾는 광고를 보고 연락을 취해 계춘의 집에 오게 된다. 계춘은 동네잔치를 열어 혜지를 맞이하지만, ‘불량 청소년’의 아우라를 풍기는 혜지에 대한 동네사람들의 눈이 곱지만은 않다. 그러나 계춘은 혜지가 어떤 모습이든 돌아와 준 것만으로 너무나 고맙다. 한동안 학교를 떠나 있던 혜지는 학교생활의 적응이 쉽지 않다. 계춘의 부탁으로 혜지의 지도를 맡은 미술선생(양익준)은 혜지의 ‘똘끼’ 속에서 예술적 재능을 발견한다. 혜지가 계춘의 사랑스러운 손녀이자 예술적 재능을 지닌 학생으로 안착되는 모습을 보여주던 영화는 반전을 통해 계춘과 관객들에게 쓰라린 배신을 안긴다.

<계춘할망>의 반전은 느닷없이 주어진 게 아니다. 마침 갈 데가 없어진 혜지가 일종의 쉼터처럼 제주로 오게 된 정황과 머쓱해하는 혜지의 모습은 의구심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혜지가 뭐든 머쓱해 할 나이인데다, 더욱이 ‘불량 청소년’이었다는 사실은 혜지의 태도를 이해할만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리고 혜지를 찾은 기쁨에 들뜬 계춘에 대한 연민과 혜지의 새 출발을 응원하는 마음이 어우러져 반전이 전하는 쓰라린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계춘 역시 혜지에 대한 미심쩍음을 최대한 부인하고 있었다. 혜지에 대한 계춘의 믿음은 객관성을 상실한 것이다. 혜지의 입장에서 ‘무조건적인 믿음’은 처음 받아보는 것이다. 반전에서 드러나는 혜지의 과거에는 해체된 가정의 그늘이 있다. 어린 시절 잠시 함께 살았던 소녀가 들려주었던 제주이야기는 그의 뇌리에 오래 남았던 모양이다. 그에게 제주는 가본 적 없는 마음의 고향이 아니었을까. 가족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혜지가 유일하게 정을 두었던 존재는 친구다. 혜지가 범죄에 연루된 것이나 이후의 행동은 모두 민희와의 의리 때문이다.

이러한 혜지의 사정은 많은 비행 청소년들의 심리적 상황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상종 못할 악인들이 아니라, 대게 정이 고픈 아이들이다. 12년간의 신산한 삶을 통해 생긴 상처를 혜지는 제주의 맑은 햇빛과 해풍에 씻어 말린다. 자신을 무조건 믿어주며 무조건 사랑하는 할머니와, 편견 없이 자신을 대하며 가능성을 알아봐준 선생님 덕에 어느덧 혜지의 내면은 변한다.



◆ <집으로>를 넘어서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면모들

영화는 계춘을 통해 무조건적인 믿음과 사랑의 위력을 보여준다. 이제는 젊은 어머니에게서 찾기 힘들어진 원형적인 모성을 시골 할머니에게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집으로>가 연상된다. 하지만 <계춘 할망>은 <집으로>에 비해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면을 지닌다. 첫째는 혈연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점, 둘째는 어린이가 아닌 불량 청소년이 등장한다는 점, 셋째는 사랑이 쌍방향적이라는 점이다.

계춘은 혜지의 정체에 충격을 받지만, 혜지에 대한 사랑이 미움으로 화하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품에 굴러와 깃들 수밖에 없었던 혜지의 삶을 연민하고 그 만남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계춘의 사랑이 비단 친손녀이기 때문에 극진했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혈연이 아닌 할머니와 손녀로 맺어진 인연도 중시하는 것이다. 또한 여섯 살에 잃어버렸다가 열여덟 살이 되어 나타난 손녀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붓기에는 만만치 않은 존재이다. <집으로>에서 딸이 와서 맡긴 어린 외손자는 무조건 귀여울 수밖에 없지만, 혜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 붓기에는 낯설고 버거운 존재일 수 있다.



계춘은 혜지의 불량기를 말하는 동네사람들에게 “혜지를 잃어버렸을 때 무조건 잘 자라고 있을 거라며 나를 위로하던 이들이 막상 혜지가 돌아오니까 혜지가 막 자란 것 같다고 험담한다”며 서운해 한다. 혜지가 어떤 모습이든 계춘은 손녀를 잃은 일이 미안하고, 그동안 못해준 게 안타깝다. 혜지가 사라지고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계춘은 혜지에 대한 사랑을 철회할 수 있었다. <집으로>의 어린 손자가 은비녀를 훔쳐 감추는 것과 손녀를 사칭한 낯선 소녀가 돈을 훔쳐 달아난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춘은 혜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혜지를 잃었던 그 시간을 되돌리려는 무의식적인 사투를 벌인다.

영화는 계춘과 가장 나쁘게 헤어진 혜지가 뒤늦게 계춘의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이후부터 새롭게 구축되는 두 사람의 관계를 담는다. 계춘의 일방적인 모성이 아니라, 그 사랑을 통해 변화된 혜지의 보답이 따뜻하게 그려진다. 이것은 성장이자 치유의 기적이다. 피폐했던 혜지의 마음에 뿌려진 사랑의 씨가 싹튼 것을 의미한다. 영화는 이 기적을 축복하기 위하여, 등장했던 모든 사람들이 합심하여 계춘의 말년을 위해 노력하는 화합의 장을 보여준다. 시종 속물처럼 보이던 부동산 업자까지 모두 선인으로 화해, 계춘을 돕는다. 이는 마치 심청전에서 심봉사가 눈을 뜨는 순간, 모든 장님들이 눈을 뜨는 것과 같은 구원의 보편성을 연상시킨다.



◆ 의외의 캐스팅과 제주를 담은 풍광

어쩌면 <계춘할망>이 너무 순진하고 착한 결말을 갖는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면이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이러한 선함이 묘하게 설득된다. 그것은 영화의 캐스팅과 관련이 있다. 동년배 여배우 중에서 가장 도회적이고 도도한 자의식을 내보이던 윤여정이 무조건적인 모성의 담지자인 제주 해녀 역할을 맡은 것은 의외의 캐스팅이다. 그러나 윤여정은 검게 탄 얼굴과 굽은 등, 수세미 같은 머리와 갈퀴 같은 손으로 제주 해녀의 모습을 훌륭하게 재현한다. 이전에 출연했던 영화 속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괴짜 같지만 교육자의 심성을 지닌 미술선생 역할을 한 양익준도 의외의 캐스팅이다. 흔히 불량스럽게나 악역으로 등장하던 양익준이 예술가이자 교사로서 제자에게 내면의 빛을 발견하고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양익준의 미술교사 역할은 썩 잘 어울린다. 그의 매끈하지 않은 겉모습이 오히려 혜지와의 교감을 끌어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캐스팅이 더 성공적으로 느껴진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악역으로 출연하였던 김희원이 순박한 이웃으로 등장하는 것 역시 의외의 캐스팅이다. 그는 언제든 계춘의 편에서 생각하고 계춘을 위해 모든 행동을 한다. 이웃일 뿐이지만, 자식보다 더 자식 같다.



이렇듯 배우들이 평소에 갖고 있던 이미지들과 상반된 역할을 맡아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의 어우러짐을 보여주기에, 영화가 동화적인 선함의 공동체를 재현한다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여기에 제주의 풍광이 보여주는 특별한 감흥이 더해진다. 노란 유채꽃, 푸른 바다, 야트막한 돌담, 한갓지게 돌아가는 풍력 발전소, 시야가 탁 트이는 오름 등은 다른 장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화로움을 선사한다. 여기에 혜지의 그림도 하나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며 녹록치 않은 시각적 쾌감을 안긴다.

<계춘할망>은 사실 별다른 비평이 필요치 않은 영화이다. 혜지의 가슴에 사랑이 담기듯이, 관객의 가슴에도 사랑이 담기면 그뿐이다. 다만 영화의 반전이 품고 있는 해체된 가정의 스산함은 현재 이혼과 재혼이 늘어나면서 가족 안에서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존재를 생각하게 한다. 영화는 계춘의 사랑을 통해 혜지가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는 성장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동을 넘어서, 해체된 가정의 아이들에게 어떤 사회적 관계를 통해 사랑과 신뢰를 심을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세상의 많은 혜지들에게 새로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치유 받고 성장하는 기회가 주어지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P.S 어린 혜지의 친어머니는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시어머니 볼 면목은 없었고, 딸은 무작정 키우고 싶은 마음에 먼저 사건을 저질러 놓고 나중에 알리려 했다가 영영 기회를 잃은 것이라고 최대한 좋게 이해해보려 하지만,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계춘할망>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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